1.

해가 뜬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 안에서 눈을 뜨자마자, 맥시마가 깨달은 것은 두통이 여전하다는 거였다. 울렁이고 뒤집힐 것 같은 속은 그나마 가라앉았지만 지끈거리는 두통은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차가운 얼음 한 덩이가 두피 안쪽 뇌 근육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것처럼 머리 전체가 얼얼했다. 진통은 밤이나 돼야 가라앉을 듯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히드라의 첫 경험 후유증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룻밤의 천국이 무려 48시간 동안 지옥을 선사하고 있다.


이제 그만 정신을 차려라, 빌어먹을.


맥시마는 옆머리를 치면서 네트에 접속했다. 앞 차창이 네트모드로 바뀌며 협회 사이트를 띄웠다. 자신의 페이지를 열어보니 새로운 메시지가 세 개 있었다. 질문 두 개와 의뢰 한 건. 그것들을 확인한 그는 다시 머리를 문지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폭력적인 여자 친구에게 대처할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사연과 일에 대한 진행사항을 묻는 문의. 폭력적인 여자 친구야 다른 대륙으로 달아나거나 쏴죽이라고 말해주면 되지만 지난달 계약한 건은 이제야 일을 시작한 상태였다. 끝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고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면 돈도 받지 못한다. 그나마 새로 들어온 의뢰가 미니라이거를 찾아달라는 거였다. 말투를 보아하니 어린애다. 푸들 저금통이라도 깰 생각인가? 제길, 여전히 도움 되는 것이 없다.


두통 때문인지 아침부터 짜증이 일었다. 개설한지 반년이 다 되어가지만 자신의 페이지는 여전히 개점휴업 상태다. 그는 시트에 몸을 묻으며 페이지 상단에 어정쩡하니 박혀있는 문구를 노려보았다.



 명탐정 Justice Maxima,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드립니다.



하긴, 나라도 너 같은 탐정은 찾지 않겠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고 그 때문에 왼 머리가 울렸다. 세상의 어느 누가 경력도 내세우지 않고 이름만 거창한 새내기 탐정에게 제대로 된 사건을 의뢰하겠는가. 그라도 값 싼 유전자변이 애완동물이나 찾는데 활용할 것이다.


맥시마는 이름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스티스’ 라니. 그 빌어먹을 탐정협회 때문이었다. 그가 남은 돈을 털어 협회에 등록하고 사이트를 개설하려 하자 협회는 그럴듯한 새 이름을 가지라고 조언했었다. 그러면서 제안한 이름이 저스티스였다. 자기들끼리 고전적이라느니 신뢰가 가는 이름이라느니 떠들어 대면서. 그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등록 후 자신의 페이지 상단에 박혀 있는 이름을 보자마자 낯이 뜨거워졌다. 아이들 만화영화에나 나올법한 이름이었다.


정신을 차리려 차창을 내리니 서늘한 아침공기와 함께 잿빛 안개가 펼쳐진 것이 보였다. 황사였다. 시스템 매니저가 미세먼지 농도를 측정하곤 차창을 닫으라고 경고했지만, 그는 무시하고 뉴스를 켜고 차에서 내렸다. 밤 동안 차창을 취침모드로, 짙은 암갈색으로 돌려놓았던 터라 몰랐는데 주위가 온통 황사였다.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증명이라도 하듯 뉴스에서 70년 만에 최악인 황사가 오늘부터 시작됐다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어디지?


이름만 뉴 제너레이션인 구형 폭스바겐은 안개 속에, 좁은 도로 가드레일 옆에 주차되어 있었다. 안개 속 아래쪽으로 보이는 희미한 건물들을 보니 인왕산 정상 도로 어디쯤인 것 같았다. 붉은 아침 햇살이 황사에 잠긴 도시를 물들이는 중이었고 종로 지구(地區) 쪽 건물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너머로 남산타워가 안개 속에 숨어 지나는 배를 기다리는 해적선의 돛대마냥 음산하게 서 있었다.


맥시마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봄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불어 닥친 황사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이 탁한 도시의 어둡고 음습한 실체들을 알았고, 그 온갖 구린내 나고 노골적으로 악한 것들과 뒤엉키던 시절부터 이 도시에 대한 환멸이 이미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일을 해야만 해.


그가 옆머리를 치면서 자신을 추스르는데 뉴스가 끊기며 벨소리가 울렸다. 앞차창이 통신모드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저스티스 맥시마 탐정 사무소입니다.”


시스템 매니저가 말했다. 앤디 보가드던가, 비음이 짜증나는 옛날 남배우 버전이었다.


“저스티스 탐정께선 지금 범인을 쫓는 중이라 통화하실 수 없답니다. 용건을 남겨주시면 저스티스가 연락드릴 거예요.”


사서함으로 넘어가자 앞 차창에 상대방의 얼굴이 떠올랐다. 니카이도 베니마루가 비웃고 있었다.


“저스티스 탐정이라, 멋진 걸?”


맥시마는 재빨리 차문을 열고 다시 올라탔다.


“범인을 놓치면 전화 주라고, 다른 건수가 있을지 모르니까······.”


“무슨 일이지?”


앞창 하단에 창의 얼굴이 떠오르지 베니마루가 짓궂게 말했다.


“어이구, 그새 범인을 잡으신 건가 탐정 나리?”


맥시마는 대꾸하지 않고 베니마루를 주시했다. 퇴직 후 연락 한번 없던 녀석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 전화했을 리 없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딱 일이 필요한 얼굴일세. 잘 됐네, 마침 자네를 찾는 의뢰인이 있거든.”


“사건인가?”


“그렇지.”


“왜 외부에 넘기려는 거지?”


“의뢰인이 선택한 거야.”


나를, 선택했다고?


“퇴직하고 탐정생활 시작했다니까 콕 집어서 자넬 지목하더라고.”


“나를 왜.”


“불도저에 대한 소문을 들었나보지. 거칠지만 끝까지 밀어붙이는 불도저 형사, 창 말이야.”


“경찰을 못 믿는 거겠지.”


“그렇지, 우리가 언제 신뢰를 준 적이나 있었나? 이미 썩어문드러진 시민의 발인데.”


베니마루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깐죽대는 것이 몸에 밴 형사였다.


“무슨 사건인데.”


“돈 좀 될 걸? 살인사건.”


노숙자나 독거노인이 죽었다면 물론 돈 같은 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뢰인이 그를 찾는다면 그런 부류의 죽음은 아닐 것이다. 맥시마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좋아, 지금 곧장 가지.”


“아니, 열 시까지만 오면 돼. 그때 의뢰인이 변호사와 함께 올 거야. 그 전에 집에 돌아가 좀 씻지 그래? 꼴이 말이 아니야, 약이라도 한 것 같은데 어떻게 좀 감춰 보고.”


제길, 눈치 하난 타고난 놈이다.


“그리고 옛 동료로서 충고하는데, 제대로 준비하고 와. 반장은 자네가 끼어드는 걸 탐탁지 않아 하니까.”


럭키 그로버 반장. 맥시마는 욱하며 욕지거릴 내뱉었다. 베니마루가 다시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반장 앞에서 웃는 연습이라도 좀 하라고.”



2.

도로를 내려오자니 인왕산 둘레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스크와 황사차폐코트를 둘러쓰고 모래 안개에 짓눌린 듯이 걸어가는 사람들. 세계가 지구연방으로 통합된 뒤 도시들은 저마다 자구책을 찾고 돌파구를 만들어 갔지만, 이놈의 도시만은 오히려 생기를 잃어가며 버려지고 있었다.


도심으로 내려온 맥시마는 자동운행모드로 전환한 뒤 시트에 몸을 묻고 약기운이 조금이라도 빠져나가도록 호흡을 다스렸다. 지근거리는 머리가 히드라 때문인지 차의 진동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고, 덕분에 두통이 여전하다는 생각은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맥없이 앞을 주시하자니 황사의 무게와 심연이 느껴졌다. 가시거리가 5미터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맥시마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좌우 심연 속에서 위협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차들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이 정렬된 채 움직였고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안에 인간미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황사에 잠겨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도시는 그의 내면처럼 막막했다.


그는 지금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현실을 헤매는 중이었다. 아무도 전직 불도저 형사를 쓰려하지 않았고, 실직수당은 끊긴지 6개월이 지났으며, 마지막 희망으로 개설한 탐정사이트는 넉 달째 개점휴업 상태다. 그는 내동댕이쳐진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인지를 깨달았다. 게다가 그는 감당하기 버거운 짐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실직과 함께 이혼한 아내와 아빠에 대한 애정이라곤 보이지 않는 일곱 살 난 딸. 법원은 그에게 아내의 위자료와 딸의 교육비를 대라는 판결을 내렸다. 위자료는 48개월 할부로 끊었지만 두 달 째 지급하지 못하고 있었고 앞으로 딸이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교육비를 조달해야만 한다. 아내는 월요일마다 대부업체마냥 전화를 걸어오고 있었고 그는 3주째 아내를 피하는 중이다.


그의 현실은 저예산영화와 싸구려 소설에나 나오는 전형적인 설정이었고 그 속에서 자신은 뻔하고 예측 가능한 삼류인생이었다. 영화와 소설 속 인생이라면 비웃고 말았을 그것들이 온전히 자신의 몫이고 자신이 감당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를 짜증나고 화나게 만들었다. 그 뒤에 찾아오는 자괴와 패배감. 지금 그는 공허와 무력감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방향을 잃고 부유하는 중이었다.


집은 3일 전 그대로였다. 집을 나서기 전 몇 주 동안 방치해둔 그대로. 맥시마는 그 혼돈을 무시하고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가 몸을 긴장시켰지만, 아직은 단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새나왔다. 뒤늦게 온수시스템이 가동되면서 뜨거운 물줄기가 뭉친 근육을 이완시켰다. 어제는 온종일 차 안에만 처박혀 있던 터였다. 온수에 몸을 내맡기자 아침인데도 노곤함이 밀려왔다. 편린들도 떠올랐다. 그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고급 향수 향, 가늘고 긴 목선……. 그러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 정말로 일을 해야만 한다.



3.

도시경찰청은 여전히 내자 지구에 위치해 있다. 언제부터 그곳에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대적 마천루들 사이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남아있는 그곳은 전통적이라기 보단 차라리 구태의연해 보였다.


지구연방정부 아래 도시들이 수평적으로 재편되면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시장은 새로운 자유 시장 체제의 신봉자였다. 죽어가는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며 시장 자리에 오른 그가 가장 먼저 단행한 것이 구조조정이었고 그 시범케이스가 하급관료들과 밑바닥 공무원들이었다. 시장의 바람에 부응하려는 도시경찰청장의 노력과 그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의 발 빠른 움직임으로 인해 허물이 있거나 혐의만 발견되어도 최우선적으로 밀려나야만 했다.


무한 자유경쟁과 거기서 창출되는 시너지. 그것이 시장의 의지였다. 선진도시들처럼 사설수사인력을 양성화해 관료적 공무경찰과 경쟁시킨다는 취지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기초 없는 누각은 부실해지고 공권력에조차 자본의 물결을 끌어들이는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능력 있는 수사관들은 스스로 독립해 막대한 수임료를 챙기며 공무를 집행했지만 남아있는 공무경찰들은 자리보전에만 급급했고 그마저도 보전 못하고 쫓겨난, 맥시마와 같은 일선 형사들은 그저 언저리만을 맴돌 뿐이었다. 경찰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맥시마가 형사과로 들어가 베니마루를 만났다. 그는 창을 외부인접견실로 데려갔고 그곳에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맥시마가 세 사람을 향해 눈짓으로 인사하자 럭키 반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의뢰인임이 분명한 40대 초반의 여자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창을 살폈다. 미모보다는 지적인 분위기와 자신감이 묻어나는 태도에서 아우라가 느껴지는 유럽 혈통의 여자였다. 맥시마는 다소 창백해 보는 낯빛으로 보아 그녀가 북유럽계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녀는 자신을 블루 마리 라이언이라고 소개했다.


“그냥 마리로 불러주세요.”


“저스티스 맥시마입니다.”


마리 곁에 선 변호사는 맥시마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말했다.


“저스티스 탐정을 기다리면서 럭키 반장님과 당신에게 수사를 맡길 것인지에 대해 논의 중이었습니다.”


맥시마는 자신을 두고 오고갔을 말들을 예상할 수 있었다. 역시나 럭키 반장이 스스로를 변호하듯 말했다.


“도시경찰청은 본연의 공적임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사건해결을 위해 법으로 보장된 외부수사인력 투입을 권장하며, 외부수사인력을 선택하는 피해자 가족의 의견도 존중합니다. 하지만 사건해결을 위해 탐정으로서 전력이 없는 맥시마 형사, 아니 저스티스 탐정보다는 저희와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저명한 사설탐정기관과의 공조를 권했던 겁니다.”


그는 맥시마를 의식하면서 애써 강조했다.


“보다 신속하고 확실한 사건해결을 위해서 말이죠.”


맥시마는 럭키 반장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자신의 손으로 잘라낸 맥시마에게 사건을 맡기는 것이 껄끄러운 것이다.


“반장님께선, 이 분의 전력은 고려하시지 않는 것 같군요?”


마리가 말했다. 감정이 실리진 않았지만 단호한 태도였다. 럭키 반장이 머뭇거리자 변호사가 말했다.


“제 의뢰인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사건이 해결되고 범인이 체포되길 원하지요. 저희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수사를 어디에 의뢰할지 검토했고, 물론 예상하셨겠지만, 도시경찰청보다는 외부사설수사기관에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11년 경찰경력 동안 가장 우수한 경찰인력 중 한명이었던 저스티스 맥시마 전직 형사에게 맡기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반장님의 권유를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이 친구는 부정혐의가, 범죄세력의 범죄사실을 조작해준 전력이 있단 말입니다. 그 때문에 경찰에서도 불명예 퇴출됐고.”


럭키 반장이 항변하듯 말했다. 4년 전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맥시마는 두통과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건 혐의일 뿐이었죠. 그런데도 반장님은 그것을 빌미로 날 해고했고.”


럭키 반장이 기분 나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면서 맥시마를 쏘아보았다.


“네 녀석이 분명해. 증거가 없을 뿐이지, 네 녀석이 분명하다고!”


맥시마는 이 빌어먹을 꼰대를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처지가 그것을 억눌렀다. 대신에 마리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요즘 같은 세상엔 부정한 것이 무능한 것보단 낫지요.”


그녀는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저스티스 탐정의 이전 문제에 대해선 거론하고 싶지 않군요. 저는 사건을 해결해 줄 능력 있는 수사관을 원할 뿐예요.”


럭키 반장은 의뢰인의 태도에 한발 물러섰다. 대신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스티스 탐정에게 공기칩 삽입을 조건으로, 그에게 수사를 맡기는 것으로 하지요. ‘다’ 레벨로, 24시간 동안 말입니다.”


“그건 내가 거부합니다.”


맥시마가 말했다. 공기칩을 쓰겠다는 것은 맥시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겠다는 의미였다. 럭키 반장은 아직도 맥시마가 4년 전 사건에 관여됐다고 믿으며, 이번 기회에 공기칩으로 그 증거를 캐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맥시마는 자신을 옭아매려는 럭키 반장의 의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내 수사에 공기칩 따윈 필요 없고, 그걸 내 안에 박아 넣지도 않을 겁니다.”


“자네가 수사를 맡는다는 건 정식으로 공적업무를 수행한다는 뜻이야. 이 도시의 법률상 모든 공직자들은 공기칩을 켜도록 되어 있지. 그것을 거부한다면, 수사를 맡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럭키 반장이 위엄을 떨며 말했다. 맥시마는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따위 걸 24시간 동안 작동시키진 않겠단 뜻이지. 그럴 이유도 없고 말입니다.”


“이유는 충분해. 첫째 아직 언론에도 노출되지 않은 이 사건은, 도시경제협력국 동아시아담당 차관이 죽은 중대 사건이야.”


지구연방 도시경제협력국 동아시아담당 차관이라. 맥시마는 대놓고 휘파람을 불었다. 도시경제협력국에서도 동아시아 경제를 담당하는 차관이라면 지구연방정부 관료들 중에서도 명실상부한 실세다. 그런 인물의 사건을 맡는다는 것은 흥행카드를 거머쥐는 것이니 럭키 반장은 도시경찰청이 직접 사건을 해결하도록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의뢰인은 외부수사인력에게 수사를 맡기려 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해고한 자에게. 맥시마는 럭키 반장이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둘째 사건의 중대성을 아는 도시경찰청은 전력을 다해 협조할 것이고, 도시경찰청 내 수사 인력들 역시 ‘다’ 레벨 공기칩을 작동시킬 계획이야. 그렇다면 자네 역시 그 조치에 따라야하지 않겠나? 아니면 빠지던가.”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자신이 놓는 덫을 차고 움직이던가, 아니면 알아서 꺼지던가.


맥시마는 모처럼 굴러들어온 사건을 차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어떤 거부감이 일었다. 공기칩으로 24시간 자신을 개방한다면 사건 해결은 별개로 다른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그것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방 안에 심상찮은 기류가 흐르자, 마리가 맥시마를 주시하며 말했다.


“저스티스 탐정님, 공기칩은 모든 공무자들이 지고가야 할 업보이기도 해요. 저 역시 공직자로서 현재 공기칩이 작동 중이죠. 공기칩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건 알겠지만, 그렇지만 저는 꼭 당신이 이 사건을 맡아주시길 바래요.”


맥시마는 잠시 그녀를 살피다가 말했다.


“왜 나를 선택한 겁니까.”


“저는 소모적인 공무경찰이나 특권의식으로 가득한 거대탐정사무소들은 탐탁치가 않아요. 제 변호사가 도시경찰청 데이터에서 당신을 추천했죠. 기록에는 당신이 11년 동안 참여한 사건들 중 64퍼센트가 해결됐더군요.”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가? 맥시마는 여자의 의도를 파악하며 물었다.


“그 정도로, 나를 찾았단 말입니까?”


“내가 주목한 건 당신이 주도적으로 담당했던 사건들예요. 편차가 있긴 하지만 당신은 수사원으로 참여한 사건들과는 달리 직접 담당한 강력범죄들에 있어선 대단한 집중력을 보였더군요. 13건의 강력사건 중 12건을 해결했었죠? 그것이 제가 당신을 선택한 이유예요.”


마리는 창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사건을 맡지 못할,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런 것은 없다. 오히려 이 사건을 수임해야만 한다. 그래야 지긋지긋한 현실의 늪을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러나 맥시마는 자신의 본능을 믿었고 이번에도 그것이 자신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그는 선택의 순간임을 알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족쇄를 발목에 차고 움직일 것인가, 그것을 거부하고 계속 현실의 나락을 헤맬 것인가.


그는 표정을 감추고 말했다.


“당신이 내 능력을 온전히 활용하려면, 날 자유롭게 놓아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공기칩은 제 능력 밖의 문제예요.”


“그렇다면 그건 내가 위험을, 개인적인 위험을 안고 움직여야 한다는 뜻인데.”


“거기에 대해선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겁니다.”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제 의뢰인은 사건의 신속한 해결을 위해 법적으로 보장된 ‘가’ 등급 사건수임료를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또한 피해자인 의뢰인의 남편은 지구연방정부 내 고위급 차관으로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시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기금이 책정되어 있습니다. 그 진상조사 기금 역시 저스티스 탐정에게 지불될 것입니다. 세금과 세부항목을 무시하고 그 금액은 대략······.”


맥시마는 손을 들어 변호사를 막았다. 세 사람이 그를 주시했고, 베니마루는 대화에 끼진 않았지만 표정을 보니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스스로를 조율했다. 어차피 족쇄를 차야한다면 또 다른 모험이 필요한 건지 모른다. 이미 내팽개쳐진 인생이니 잃을 것도 없다. 그는 그 모험에 몸을 던지기로 했다.


맥시마는 자신을 주시하는 마리를 직시하면서 말했다.


“그 금액이 얼마이든, 그 두 배를 원합니다.”



4.

공무를 보는 자들에게 이미 일상이 된 공기칩 이식은 대단한 수술이 아니다. 더욱이 형사 시절 데이터가 남아있던 맥시마는 칩을 삽입하고 계정을 다시 열어 서버와 동기화시키기만 하면 된다. 나노칩 삽입은 그 옛날 보톡스 투약만큼이나 간단했지만, 그러나 맥시마는 그 자체의 행위에서 거부감이 일었다.


“그렇다고 너무 언짢게 생각하진 마세요.”


맥시마의 뒷덜미에 칩을 박아 넣을 준비를 하면서 시라누이 마이가 말했다. 기술부 연구원인 그녀는 맥시마를 꽤 따르던 일본계 연구원이었다.


“그냥 짜증나는 것뿐이야.”


맥시마는 의료침대 위에 엎드리며 정정했다.


“뭐, 그 말이 그 말이지만.”


“그냥 법이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따라야죠.”


“그 엿 같은 법이 왜 이 도시에만 있느냔 말이야.”


“그, 그런가요? 다른 도시는 그렇지 않나요? 저는 몰랐어요.”


투입기를 잡은 마이의 손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이어서 작은 통증과 함께 짜릿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뻗어나갔다.


“조심하라고.”


“아, 죄송해요.”


당황한 마이가 투입기를 바로 잡자, 부웅 소리와 함께 이물질이 자신의 뒤통수 어딘가로 찾아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명 공기칩으로 불리는 ‘공직자공공기록칩’은 공무자들의 신체기능변화를 기록하는 일종의 블랙박스였다. 그것이 이식된 사람은 맥박과 호흡, 땀 등 신체기능 변화뿐만 아니라 뇌파까지도 도시정부 공공서버에 모조리 기록된다. 그는 지금 스스로는 풀 수 없는 개목걸이를 차는 중이었고, 비로소 자신이 다시 공무를 맡게 됐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다 됐습니다.”


2분 후에 마이가 투입기를 제거했다. 그녀는 모니터를 살피면서 말했다.


“제대로 자리 잡은 것 같은데요, 맥시마 형사님? 아니 이젠 탐정님이신가? 어쨌거나 제가 받은 공문대로 수사기간은 30일로 설정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사건이 해결되면 언제든 다시 제거할 수 있고요. 이제 네트에 접속해 동기화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시간부터 탐정님의 모든 신체 데이터가 공공서버로 전송됩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기다려.”


마이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맥시마는 그녀를 외면하면서 호흡을 가누었다. 그리고 생각을 집중했다. 이제부터 몸 안의 블랙박스를 24시간 내내 켜두어야 한다. 지금부터 그의 감정변화에 따른 모든 생채변화와 생각의 파형들이 속속들이 기록될 것이다. 그것은 뇌관의 스위치를 다시 켜는 짓이고 뇌관은 작은 자극으로도 터지게 될 것이다. 럭키 반장이 노리는 4년 전 사건과 자신이 맡게 될 이번 사건에 대해서 모두.


이것은 게임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스스로를 제어해야 한다. 그리고 평형을 유지해야만 한다.


맥시마는 숨을 고르며 돌아보았다. 젊은 연구원은 핵미사일 발사 버튼을 앞에 둔 부관처럼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맥시마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면서 말했다.


“좋아, 시작해.”



5.

기술부에서 나오자 베니마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맥시마는 그와 함께 피해자 집으로 향했다.


“다시 수사를 맡게 된 걸 축하해.”


베니마루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는 앞으로 맥시마의 수사를 도우면서 도시경찰청과의 공조를 연결할 것이다. 그러나 맥시마는 베니마루의 임무가 그것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럭키 반장으로부터 자신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맥시마는 베니마루의 말을 무시한 채 현장재연모듈을 확인했다.


“당연히 설치되어 있지. 이제 공식적인 수사가 시작되는데.”


맥시마는 끄덕였다. 피해자 발견당시를 살펴보면 사건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어떤 여자지?”


“마리? 도시검찰청 고위직에 있는 여자라는 것만 들었어. 앞으론 자네가 수사를 주관할 테니 그 여자에 대한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을 거야.”


“남편은 도시경제협력국 차관에, 아내는 검찰 간부라.”


“그야말로 로열패밀리란 소리지.”


맥시마는 끄덕이면서 말했다.


“관료적 인간들이란 뜻이기도 하지.”


사건현장은 청담 지구에 위치해 있었다. 도시의 거주 지역 대부분이 닭장 같은 아파트들로 들어찼지만 이 지역만은 고풍스러운 저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이 지난 세기 부호들에 의해 지어진 도시문화제 지정 건축물들이어서 저마다의 개성들을 내뿜고 있었다.


시스템 매니저가 알려준 곳은 다른 집들과는 달리 작은 묘목들이 담장을 대신하고 있었다. 유전자변이 관상수들이었다. 곳곳에 감시 카메라들이 보였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사각지대를 통한 침입이 가능해 보였다. 정문을 통과하니 미니 골프 돔을 사이로 선 건물 두 채가 보였다. 베니마루의 설명에 의하면 오른쪽 지상 2층, 지하 3층짜리 건물이 본채였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왼편의, 그 보다 규모가 작은 2층짜리 별채였다. 모던한 강화 플라스틱과 유리로 구성된 것을 보니 최근에 지어진 듯했지만 전통적인 본채와 균형을 이루는 디자인이었다.


맥시마는 현장을 보기 전에 본채로 가 먼저 도착한 마리를 다시 만났다. 계약을 위해서였다. 맥시마는 예의 사무적인 태도의 변호사를 보면서 그가 자신의 의뢰인이나 피해자에 대해, 어쩌면 사건 자체에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변호사가 모니터에 계약 내용을 띄우면서 말했다.


“오전에 당신은 제 의뢰인이 제시한 금액의 두 배를 요구했었죠. 의뢰인의 법률 대리를 맡고 있는 저희 K&C 법률회사는 당신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의뢰인께선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가’ 급 수사비용과 피해자의 진상조사기금의 액수를 초과하는 비용에 대해선, 제 의뢰인 블루 마리 라이언씨께서 개인적으로 지불하실 예정입니다.”


맥시마가 돌아보자 마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에 서명 하시면, 세금을 제외한 총 금액의 33.3 퍼센트가 24시간 내에 탐정님 계좌로 입금될 겁니다. 수사진행 상의 모든 비용은 저희 K&C 법률회사가 집행할 것이며, 당신이 사건을 해결하면 사건 종결 후 24시간 안에 나머지 금액이 집행될 것입니다. 대신 계약 시한인 30일이 지나도 사건을 해결 못하거나, 해결을 위한 단서를 찾지 못하거나,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면 제 의뢰인은 계약을 파기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계약된 금액의 절반을 반환하셔야······.”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사건을 해결할 테니.”


맥시마는 변호사의 말을 끊고 모니터의 계약 내용에 서명했다. 그것은 맥시마의 진심이었고 의지였다. 동기야 어찌되었든, 그는 이 사건을 해결하고 일을 완성해야만 했다. 그는 마리에게 말했다.


“이제, 현장을 볼까요.”



6.

별채는 주거와 사무공간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맥시마와 베니마루를 안내한 마리는 도시경제협력국 동아시아 담당 차관이란 밤낮없이 일에 둘러싸인 직책이며, 그럴 때마다 이오리가 별채를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야가미 이오리. 그것이 피해자의 이름이었다.


2층 침실을 채운 가구들은 피해자의 취향이 유럽풍임을 대변하고 있었고 본채 쪽을 향해 난 커다란 창은 스크린모드로 전환되어 ‘이곳은 사건 현장이므로 출입을 금지함’ 경고문이 떠 있었다.


“상황을 먼저 볼까?”


맥시마가 침실에 설치된 현장재연모듈을 확인하곤 베니마루에게 말했다. 베니마루는 깐죽거리려다 마리를 의식하고는 군말 없이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그가 모듈을 일깨우고 도시경찰청 서버에 접속해 데이터를 불러내는 동안, 맥시마는 마리에게 물었다.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누굽니까.”


“저예요.”


그녀는 초동수사를 경험해서인지 침착한 모습이었다.


“전 어제 아침 06시경에 돌아왔어요. 앞마당에 정원사가 잔디를 가꿀 채비를 하고 있었죠. 그는 이 집에서 가장 먼저 기상하는 사람예요.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침실에 그이가 보이지 않았어요. 옷을 갈아입고 정원으로 나갔더니 정원사가 자기는 05시 조금 지나서 나왔는데 아무도 못 봤다고 하더군요. 전날 밤 남편이 집 안에 있었던 것은 분명했고요. 일 때문에 새벽에 나갔나 생각하곤 전화를 하려는데, 그때 별채 2층 침실에 불이 켜진 게 보였어요.”


“당신은 항상 그 시각에 들어옵니까?”


“아뇨, 어제는 런던 시티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런던 도시검찰국 주재로 이번 주까지 세미나가 있거든요. 저는 예정되어 있던 일정 때문에, 아침에 출근하려고 일찍 돌아왔어요. 05시 2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죠.”


맥시마는 끄덕이면서 마리의 말뜻을 되짚어보았다. 베니마루가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들었다.


“다 됐어. 시작할까?”


맥시마가 끄덕이자 베니마루가 현장재연모듈을 작동시켰다. 구석마다 설치된 네 개의 모듈이 각자의 각도와 범위를 체크하면서 어제 아침의 상황을 홀로그램으로 재연했다. 침대 위에 피해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바닥에는 두 개의 물건이 나타났다. 현장검증팀이 곳곳에 체크해놓은 넘버들도 표시되었다. 초동검증 후 누군가 건드렸는지 침대가 오차를 보이며 이중으로 겹쳐 보였다. 베니마루가 홀로그램 속으로 들어가 침대 위치를 조정하자 전체 광경이 제자리를 찾았다.


베니마루가 단말기를 흩어보면서 말했다.


“경찰과 함께 출동한 기술부 친구들이 어제 아침 06시 37분경에 스캔한 광경이야. 현장검증팀의 1차 검시결과 사망 시각은 03시 20분 경. 당시 보안업체 경고음은 울리지 않았고 집안 내 감시카메라들 역시 깨끗했어. 발견자 최초 증언에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되어 있군.”


마리가 보충하듯 말했다.


“확실해요. 현장을 발견하곤 곧바로 신고부터 했어요.”


맥시마는 홀로그램 속 정보들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이오리는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풀어 헤쳐진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가슴과 하체의 무성한 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침대 시트와 베개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장식장에서 떨어진 감사패와 아프리카 산 조각 작품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투광모드였던 창문으로는 어제 아침의 본채 주변을 보여주었다.


맥시마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살폈다.


“범인과 몸싸움이 있었던 건가?”


“사인은 아니지만 피해자 가슴과 등, 오른쪽 팔꿈치에서 타박흔이 발견됐어. 아마도 범인에게 걷어차이면서 장식장에 부딪친 것 같아. 그 때문에 감사패와 장식품이 바닥에 떨어졌고.”


“범인을 남자로 가정한다면 그렇겠지.”


 베니마루가 으쓱하며 단말기만 만지작거렸다. 맥시마는 바닥의 카펫을 발로 문질러 보았다. 범인의 흔적이 남아있을 법했다.


“바닥에선 뭔가 나왔을 것 같은데?”


“아니, 집안 전체가 깨끗해. 범인이 날아오지 않았다면 울타리를 넘고 감시카메라 사각지역을 통해 20미터 정원을 가로질러왔을 텐데, 정원의 흙 하나 남아있지 않아. 흙부스러기가 발견됐지만 그건 피해자 옷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어.”


“경화 실리콘이로군.”


“아마도. 아래층 카펫에서 낯선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발 크기가 3백 50밀리미터였어.”


경화 실리콘은 오래전부터 범죄자들에게 유용한 수법이었다. 범인들은 5초 안에 굳는 실리콘을 신발에 뿌려 자신들의 흔적을 감추곤 했다. 그것은 이 피해자의 죽음이 계획범죄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니면 범인이 아주 용의주도한 놈이던가.


맥시마는 마리를 돌아보았다.


“남편께선 매일 밤 이곳에 머물렀나요?”


“일이 있을 때만요. 대개는 낮에 업무를 봤고, 밤늦게까지 일할 때면 보좌관들도 함께 머물렀죠.”


“그러면 남편께선 그 새벽에 왜 이곳에 있었던 걸까요. 그것도 저런 차림으로?”


마리는 가운이 풀어헤쳐진 남편의 홀로그램을 보다가 말없이 맥시마를 주시했다. 그는 그녀의 표정을 체크했다.


“사인은 뭐지?”


“부검결과는 전기 충격에 의한 쇼크사로 되어 있군.”


맥시마는 베니마루를 돌아보았다.


“스턴 건?”


“그래. 스틱형 전자충격기.”


베니마루가 단말기를 조작하자 홀로그램이 이오리를 확대해 자세를 회전시켜 보여주었다. 풀어진 가운 속 심장 부위 피부색이 동그란 형태로 새카맣게 탄 것이 보였다. 주변의 가슴 털 역시 그을려 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스틱형 전자충격기는 보급형이 아니야. 시위 진압용이지. SNK 사와 네스츠 사에서 시 정부에 보급하는데, 그들 두 개 회사 제품이 시 전체 판매량의 76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어.”


맥시마는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그러나 청계 지구에 가면 그런 건 손쉽게 구할 수 있지. 스틱형이든 총포형이든.


베니마루가 예의 근질근질한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그 말은 2만 4천 명의 시위진압대를 1차 용의선상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뜻이지.”


맥시마는 베니마루를 무시하고 피해자의 가슴을 다시 살펴보았다. 통상적으로 허가 받은 전자충격기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맥시마는 형사 시절, 아직도 무기소지가 불법인 이 도시에서 스턴 건을 고전류로 개조해 살상무기로 사용한 범죄사례들을 여럿 보았다. 이오리를 죽인 자 역시 같은 식으로 개량했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개량의 목적이다. 범인은 그저 개량된 스턴 건을 소지하고 다니는 악의적인 강도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개조한 스턴 건을 들고 피해자의 침실로 들어온 것인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맥시마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입구를 살펴보았다. 잠금장치는 깨끗했고 네스츠 사의 보안센서가 달려 있었다. 베니마루가 몇 개의 지문이 나오긴 했지만 모두 출입이 허가된 사람들의 것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거실 창문과 뒤쪽에 출입구가 있긴 하지만 역시나 침입한 흔적 따윈 없었어. 사건 당시 이곳 별채는, 말 그대로 밀실이었던 셈이지.”


“최근에 교체한 것 같군요.”


 맥시마가 보안센서를 살피자 마리가 설명했다.


“10개월 전 그이가 차관으로 입명된 뒤 신형으로 바꿨어요. 업무보안상 신중을 기하려고.”


“그럼 평소에도 잠겨있는 겁니까?”


“항상요. 보안센서에 입력되고 허가된 사람들만 코드를 지정받아 출입할 수 있어요.”


마리는 차분한 태도로 맥시마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이는 의심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도시경제협력국 차관이 된 후 자신의 직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별채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죠. 낮에는 정보가 입력된 도시경제협력국 직원들만 출입할 수 있었고 집안 메이드들 중에서도 신임하는 몇 명만이 출입코드를 받았어요. 그 사람들 모두 출입가능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요. 만약 출입코드가 없는 사람이 강제로, 또는 출입코드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출입가능시간 외에 들어왔다면 경보가 울리고 몇 분 안에 사설경비업체가 출동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돌아올 때까지 조용했어요.”


“남편께서 직접 문을 열어주었을 수도 있겠죠.”


마리는 그 가능성을 반박했다.


“그럴 이유가 없어요. 출입코드가 없는 중요한 손님이 오지 않았다면 말예요. 그렇지만 메이드들 말로는 전날 밤에 손님은 없었다고 했어요.”


“낮과 밤 모두 출입가능한 사람들은 누가 있습니까.”


“그이하고 저뿐예요.”


맥시마는 마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말하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시선은 항상 맥시마를 주시했다. 그는 그것이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익혀온 몸에 밴 귀족적 습관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맥시마와 같은 부류와는 다른 자부심과 당당함. 그는 이오리에 대해 언급하는 마리의 태도를 보면서, 그녀가 남편을 애도하기 위해 범인을 잡으려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맥시마를 고용한 것이었다. 이 여자는, 도시경제협력국 동아시아 담당 차관인 남편을 사랑했을까?


마리가 역시나 맥시마를 직시하면서 말했다.


“그러면 저도 용의선상에 오르는 건가요?”


맥시마가 그저 으쓱했다. 그녀는 잠시 동요하는 듯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말했다.


“그것이 당신의 임무이니 나를 어떻게 취급해도 상관은 않겠어요. 그러나 의미 없는 것에 힘을 쓰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것은 내가 결정할 바요.”


“전 당신에게 수사를 맡긴 의뢰인예요. 그런데도 제가 범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탐정으로서 나는 몇 가지 수사원칙에 의존합니다."


맥시마가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는 아날로그적인 수사원이었다.


"그 첫 번째가, ‘시체를 발견한 사람부터 의심하라’ 는 것이죠.”


마리의 표정이 당황하면서 굳어졌다. 그러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만약 당신이 범인이라면,”


맥시마는 지지 않고 그녀를 직시하면서 말했다.


“그래도 수사료는 지불해야 합니다.”



7.

이틀 동안 온갖 정보와 자료들이 맥시마의 데이터 서버로 쏟아져 들어왔다. 맥시마는 그것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분류했다. 피해자 이오리는 남부 유럽계 서울 사람이었으며 기록상 청렴하고 강직한 공무원이었다. 지구연방이 출범한 후 상해 시티 후보와 경합을 벌인 뒤, 서울 시티즌으로서는 최초로 지구연방정부 고위관료로 발탁된 인물이었기에 임명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현장을 체크하고 가족과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한 창은 단순 절도나 강도의 소행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본채에는 침입의 흔적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아 범인은 처음부터 별채가 목적이었다. 별채에는 고가의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래층의 사무공간에도 주요 문서들과 데이터들이 있었지만 문서들은 개인금고에서 안전했고 도시경제협력국 서버와 연결된 컴퓨터는 해킹의 흔적이 없었다.


죽기 전 이오리는 ‘아시아-유럽횡단고속열차’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구연방정부 차원의 장기적 국책사업이었고 동아시아 각 도시마다 기점 도시로 유치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오리의 직책과 영향력에서 많은 소문들이 파생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언론은 피해자의 죽음을 도시 간의 정치적 음모 쪽으로 몰아갔다. 언제나처럼 사건의 본질보다는 외적이고 가십적인 것에만 관심이 쏠렸다. 맥시마는 그러한 것들에는 흥미를 두지 않았지만, 언론과 도시경찰청 상부의 압력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기에 베니마루에게 이오리에 대해 파라고 지시했다. 이오리의 경력과 인간관계, 도시경제협력국 차관이 된 후의 행적들, 정치적 관계들, 금전과 여자 문제들까지 파헤쳐 뭔가 건져내야 하는 것이 베니마루의 임무였다.


이오리에 대한 조사를 베니마루에게 맡긴 것은, 그쪽에서는 얻을 게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맥시마는 이오리의 죽음이 직책과 관련 있었다면 범인이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진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지구연방정부의 ‘도시경제협력국 동아시아 담당 차관’ 이었기 때문에 죽었다면, 그는 대놓고 암살을 당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또는 호텔 식당에서 디저트를 먹는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것이다.


맥시마가 보기에 그의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기술과 네트가 도시들을 점령한 시절에도 맥시마는 옛 방식을 고수하는 수사원이었고, 형사 시절 그가 욕심냈던 사건들은 모두 자신의 직감과 본능을 믿고 밀어붙인 것들이었다. 그는 그 사건들을 대부분 풀어냈고 그것이 마리가 자신을 선택하는 근거가 됐음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피해자의 아내를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맥시마의 그런 방식을 베니마루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마리는 알리바이가 확실했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말이 안 되잖아. 그 여자가 범인이라면 거금을 들여 외부수사인력을 끌어들이진 않았을 거라고. 어영부영 시간만 때우는 도시경찰청에 맡기는 것이 보다 안전하지.”


베니마루의 논리에도 일리는 있었다. 마리가 범인이라면, 그녀가 자신의 범행을 감추려 한다면 도시경찰청에 공적수사를 맡기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 그러면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궁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에 갇히지 않는 것이 맥시마와 베니마루의 차이였다.


맥시마는 사건현장에서 체크했던 마리의 태도를 의심의 근거로 삼았다. 그녀는 내내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고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도도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렇다고 범인을 잡으려는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맥시마의 수사에 적극 협조했고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고상한 품위를 견지했다. 그러나 맥시마가 한밤중에 풀어헤쳐진 가운을 입고 죽은 남편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동요했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분명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


맥시마는 자신이 직접 마리의 행적을 조사했다. 런던에서 도시검찰 세미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매년 열리는 세미나는 1년 전부터 일정이 잡혀 있던 것이었다. 그녀는 사흘 동안 세미나에 참석했으며 사건이 벌어진 시각에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알리바이는 확실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의심이 갔다. 너무나 명확한 그림이었다. 맥시마는 요즘 같은 시절엔 알리바이를 사거나 조작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의도다. 마리가 범인이라면, 그녀는 왜 남편을 죽였는가?


그녀는 온화함 속에 격식과 예절이 몸에 밴 전형적인 상류층 여성이었다. 지구연방시대 이전 북유럽 어느 나라의 귀족 집안 출신인 그녀는 귀족적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여인이기도 했다. 정통 엘리트 교육을 받고 일선 검찰 현장들을 두루 거친 그녀는 현재 도시검찰청 대외홍보부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 직위는 그녀가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시경제협력국 차관인 남편은 그녀의 앞날에 여러모로 지원군이 될 것이다. 그런 그녀가 남편의 죽음으로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 부분이 막히는 부분이었다. 대외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평판이 좋았고 집 안 메이드들의 증언 역시 그들이 모범적인 부부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시마는 경험적으로 그러한 소문과 증언들을 믿지 않았다.


맥시마는 마리의 공직자공공기록칩 열람을 신청했다. 검찰간부로서 그녀 역시 공기칩을 삽입하고 있었기에, 남편의 죽음을 발견할 당시 그녀의 심리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비록 제한과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을 밀어붙여 그녀의 공기칩 열람권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녀는 ‘가’ 레벨이었다. 시체를 발견할 당시 그녀의 공기칩은 오프 되어 있었다.


그는 공기칩이 무용지물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최초 공직자공공기록칩이 도입된 것은 아직까지도 만연한 공직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근절한다는 목적이었다. 도입 초기에 그것은 운전수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저명한 여성 정치인의 허물을 밝혀내기도 했다.


공기칩 도입을 발의한 정치인들은 그러한 사례를 들면서 공직자들의 기강을 잡기 위한 합법적 조치임을 강조했지만, 맥시마와 같은 말단 공직자들은 그것이 허울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공직자 등급에 따른 공기칩의 작동시간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법적 근로시간 기준 주당 30시간을 의무적으로 작동시켜야 했지만 ‘가’ 레벨 고위공직자의 경우 작동시간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가 있었다. 여전한 커넥션들은 공기칩이 작동하는 시기를 피해 이루어졌고 당연하게도 고위공직자들의 비리검거율 감소는 미미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것에 의해 강제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은 로비를 받을 위치도 아니고 의지도 없는 ‘다’ 레벨의 말단 공직자들뿐이었다.


그러나 맥시마는 이제까지의 데이터만으로 마리를 용의선상에서 제외시키는 오류는 범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 개인적인 냄새가 난다면 그녀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피해자가 밀실과도 같은 별실에서 죽었고 그의 아내가 명확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 맥시마는 이것이 아주 고전적인 범죄라는 사실을 알았다.



8.

계약금이 들어오자 맥시마는 우선적으로 아내에게 밀린 위자료와 딸의 교육비를 입금했다. 아내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돈을 제 때 입금하라는 말만 했고 그가 딸아이 안부를 물을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에게선 전남편에 대한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아무 감정도 일지 않는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그는 현실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부유물 위를 짜증스레 떠가고 있었다.


일상에 대한 회한과 함께 그를 짓누르는 것은 공기칩에 대한 스트레스였다. 자신이 느끼고 동요하고 긴장하는 감정들이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있는 상황이 그를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럭키 반장은 아직도 4년 전 사건에 미련을 갖는 것 같던데?”


베니마루가 귀띔해주었다. 맥시마 역시 럭키 반장이 자신의 데이터들을 모니터하리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럭키 반장은 그의 허점을 캐려하고 있었고 블랙박스에 기록된 뇌파와 감정들을 체크해 이오리 사건과는 다른 것들을 찾아내는 중이리라. 그것은 맥시마가 매 순간마다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맥시마 앞에 놓인 과제였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의 심리상태를 공허하게 부유하도록 내버려두면서 직감과 본능에만 의지했다. 그는 사건을 해결하고 일을 완성하는 데에만 몰두했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새로운 단서 몇 가지가 나타났다.


먼저 이오리의 체내에서 디에틸 프탈레이트(DEP)가 검출되었다. 카드뮴과 같은 독성 화학물질이었지만 극히 미세한 양이었기에 이오리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지는 의심스러웠다. 반면 범행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전화와 보안센서의 기록이었다. 이오리의 전화에서 메시지 하나가 삭제된 기록이 나왔는데, 그 시각이 03시 24분이었다. 사망시각이 03시 20분이었으니 범인이 이오리를 죽인 직후 메시지를 지웠다는 뜻이었다.


별채 입구의 보안센서 역시 의심스러웠다. 보안업체에서 제출받은 서버 기록에는 그날 새벽 보안센서가 해제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안코드를 입력한 사람은 이오리 본인이었고, 그는 새벽 02시 37분경 보안코드를 입력하고 별채로 들어가면서 보안센서를 해제해 놓았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맥시마는 메시지 삭제 기록과 보안센서의 기록이 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이오리가 누군가의 메시지를 받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별채로 들어가면서 보안센서를 해제해 놓은 거라면? 그러나 그 가설에는 의문이 뒤따른다. 그날 새벽에 손님이 있었다면 이오리는 왜 보안센서를 해제까지 해 놓은 것인가. 그저 자신이 문을 열어주면 될 터인데. 또 다른 가설. 이오리가 심야의 손님이 있다는 것을 집안 메이드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면? 그는 02시 37분경 보안을 해제해놓고 손님이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손님은, 범인일지 모르는 그 손님은 그 시각부터 사망시각까지 아무 때나 출입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심야의 손님에 대한 가설은 신빙성이 있었고 맥시마에게 다른 문제를 안겨주었다. 바로 마리 외에 제 3의 인물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심스러운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고, 바로 그 타이밍에 베니마루가 다른 용의자를 가져왔다.


“이 정도면 용의선상에 올려도 될 것 같은데?”


그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단서를 물었다는 사실에 사뭇 상기되어 있었다.


“바이스라는 로비스트야.”


“로비스트?”


“그래, 그 바닥에선 제법 유명하더라고. 다국적기업들과 연방정부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미모의 여성 로비스트지.”


베니마루가 여자의 데이터를 모니터에 띄워주었다. 맥시마는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이 여자가 의심스러운 이유는?”


“옛날식으로 발품 좀 팔았지. 도시경제협력국 동아시아담당 부서를 탐문했더니 이오리 차관이 부임한 뒤로 그 동네에 이 여자의 이름이 오르내리더라고. 당연히 신임 차관과의 염문설이 돌았지.”


“근거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여기저기 찔러봤는데, 정황은 있지만 소문만 무성하고 나온 게 없었어. 공식적으론 이오리가 부임 초기에 공적인 자리에서 한두 번 인사를 나눈 것이 다였지.”


“표정을 보아하니, 다른 만남을 포착했군.”


“그렇지, 딱 한 번의 만남이 이 베니마루의 레이더에 포착됐지.”


베니마루가 이죽거리며 웃었다.


“맞아. 작년 여름 6월 19일 오후에, 두 사람이 플레이모어 호텔에 체크인 했어. 물론 각자의 용무로 6층과 8층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였군.”


“그렇지. 그 날 이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났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 후 연방정부의 정책사업 하나가 오로치테크 쪽에 수주됐어. 입찰 당시 수주를 딸 것으로 예측됐던 기라성 같은 다른 다국적기업을 제치고 말이야.”


“당연히 이 여자는 오로치테크 쪽 로비스트였을 것이고?”


“빙고.”


맥시마는 베니마루가 스스로에 대해 만족감을 느낄 시간을 준 후에 물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이오리를 죽일만한 이유는?”


“그거야······.”


베니마루는 비로소 우물거리며 입을 닫았다. 그것이 외부수사인력과 공무경찰의 차이였다. 공무경찰들은 ‘사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의 문제이기도 했다. 책임지고 싶지 않으니 숲을 보기 보다는 그 안의 나무둥치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맥시마는 데이터에 첨부된 바이스의 사진들을 흩어보았다. 스물네 컷의 사진들은 모두 다른 여자들처럼 보였고, 어떤 얼굴들은 어딘가 낯이 익어 보이기도 했다.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줄 아는 여자였고 모두 매혹적인 모습들이었다. 맥시마는 이런 여자라면 충분히 로비스트로 유명세를 떨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를 한번 만나 보지.”


맥시마가 말하자, 베니마루가 안도하며 웃었다.



9.

평택 지구. 지난 세기 외국 군대가 주둔해 있던 곳에 여지없이 닭장 아파트들이 들어섰고 그나마 볕 좋은 곳에는 상류층들을 위한 전원주택 촌이 자리를 잡았다. 바이스의 저택은 그곳 대로변을 중심으로 오른쪽 끝 쪽에 위치해 있었다. 안마당에는 1.5미터 크기의 세쿼이아덴드론 두 그루가 서 있었다.


베니마루가 차에서 내리면서 비웃었다.


“저런 걸 자이언트 세쿼이아라고 불러야 되는 건가?”


맥시마는 유전자변이목을 지나쳐 저택 쪽으로 걸어가면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지만 하얀 인조 대리석으로 마감된 집의 전경이 눈에 익었다.


내가, 이곳에 온 적이 있었나?


물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맥시마는 자신이 사건에 대해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라고 자신을 추슬렀다. 그는 도움 되지 않는 생각을 지우면서 출입문에 달린 스크린을 터치했다.


남미계 우람한 몸집의 메이드가 두 사람을 거실에 기다리게 한 다음 2층으로 올라갔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기다렸고 슬슬 짜증이 일 즈음에 여자가 계단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황한 맥시마는 자신도 모르게 뒷덜미를 더듬었다. 느껴지지도 않는 공기칩이 볼록하게 만져지는 것만 같았다. 당혹스러움과 가쁘게 뛰는 심장 박동이 공공데이터 서버에 생생히 기록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비로소 베니마루의 데이터에서 보았던 사진들이 왜 낯이 익었는지, 저택의 풍경이 왜 익숙하게 느껴졌는지를 깨달았다. 히드라에 취했던 그날 밤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


“도시경찰청 강력계의 베니마루라고 합니다.”


베니마루가 여자에게 말했다.


“이쪽은 이번 사건을 주관하는 외부수사원 저스티스 탐정이고.”


그녀 역시 놀라고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맥시마는 그녀의 반응이 그날 밤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밝혀진 자신의 신분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를 자제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 여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젠장, 로비스트 바이스를 찾아온 거잖아.


여자가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도시경제협력국 야가미 이오리 차관의 죽음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서 말이죠.”


여자가, 바이스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영문 모르고 긴장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맥시마는 그녀가 이오리의 죽음과 관계가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없을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10.

차 안에서 깨어나기 전전날 밤. 맥시마가 킹이 운영하는 재즈 바에 들어간 것은 마지막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주인의 이름처럼 이국적이고 고즈넉하거나 현실을 잊을 만큼은 낯선 곳이길 바랐지만 의외로 싸구려 술집이었다. 약물중독자들이 다른 중독자들을 찾아 배회하는 곳이었다.


맥시마는 아무래도 좋았고 그곳에서 세기가 바뀌어도 살아남은 블렌디드 스카치를 주문했다. 스트레이트로 연거푸 석 잔을 마신 그는 다시 언더락을 시키고 LSD를 섞었다. 비상구가 필요한 그에게 알약은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저렴한 돌파구였다. 술잔을 노려보다가 기어이 잔을 들어 마시려 할 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사내 둘이 혼자 술 마시는 여자를 집적거리고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봐두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던 여자였다.


노골적이고 뻔한 상황이었지만 분위기가 다소 달랐다. 여자는 겁먹거나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호기심과 가소로움이 뒤엉킨 표정으로 남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맥시마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으니 어지간히 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약에 취한 것이 분명한 녀석들은 여자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낄낄거렸다.


맥시마는 여자와 눈을 마주쳤고 공허하게 풀린 그녀의 눈을 보면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녀석들에게서 맥시마에게로 호기심을 옮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 의협심 따위엔 관심도 없는 그였지만 녀석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한 놈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녀석들이 씩씩대며 도망치자 여자가 다가왔다. 맥시마는 비로소 그녀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름 사연이 있어 보이던 여자는 그에게 히드라를 권했다. 어둠 속에 아기자기한 세쿼이아덴드론을 볼 수 있었고 그녀의 집이었던 것 같았지만 어디로 향했었는지는 가물가물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짙은 향수 향뿐이었다.


이른 아침 약에 취한 채 도망치듯 여자의 집을 나선 그는 무작정 차를 내달렸다. 그것은 일종의 블라인드 스핀이었다. 랜덤모드로 쉬지 않고 달리는 차의 소리 없는 진동 속에서 그는 하루를 꼬박 히드라의 후유증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주와 부산과 삼척을 경유해 다음날 아침 눈을 뜬 곳이 인왕산 정상도로였던 것이다.



11.

“야가미 이오리 차관의 죽음에 대해?”


여자가 말했다. 당황하던 그녀는 이내 자제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예의 매력적인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베니마루에게 질문하도록 맡긴 맥시마는 당황하는 베니마루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허둥대고 더듬으면서 이오리의 죽음과 찾아온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여론이 들끓는 사건이어서인지 그녀는 놀라는 연기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날 밤의 도발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도도하리만치 침착함을 유지했기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바이스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베니마루가 사건 당시의 알리바이를 묻자 그녀는 맥시마를 한번 의식하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즈 바에서 낯선 남자와 만나 히드라를 권하고, 어울리고 있었다는 대답은 고위인사들을 상대하는 로비스트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그 문제는 변호사와 상의한 후에 대답하겠어요.”


맥시마는 상황 자체가 불편했고 공기칩에 기록되고 있을 자신이 짜증스러웠다. 그는 베니마루를 제지하면서 말했다.


“로비스트시라면 주로 무슨 일을 합니까?”


“지금은 상해시티를 위한 일을 봐주고 있어요. 제 업무 내용까지 말씀드려야 하나요?”


맥시마는 잠시 그녀를 살피다가 말했다.


“그럼 이오리 차관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언제죠?”


“글쎄요, 그건 스케줄을 확인해봐야 알겠는데요?”


바이스는 으쓱하며 창을 보았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맥시마는 의아하게 쳐다보는 베니마루를 의식하곤 형식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실이 발견된다면, 다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저스티스 탐정님이라고 하셨나요?”


그날 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었다. 그 역시 그랬다. 이 집에 들어온 후 그녀는 처음으로 그날 밤의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저는 이 도시의 고위층 인사들을 많이 아는 편예요, 저스티스 탐정님.”


“그건, 압력인가요?”


“아녜요. 이오리 차관의 죽음은 저도 뉴스를 봐서 알고 있고, 다만 그 분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고 싶지 않다는 뜻예요.”


맥시마는 표정 없이 말했다.


“당신이 그의 죽음과 관계가 없다면, 걱정 안 해도 될 거요.”



12.

돌아오는 차안에서 베니마루는 맥시마의 행동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어차피 공기칩에 기록되었을 테니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와의 재즈 바에서의 만남에 대해 털어놓자 베니마루는 비로소 예의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바이스라는 그 여자가 그런 곳에서……”


그날 이후 맥시마는 사건 전체를 되새김질 했다. 자신이 세웠던 수사방향과 목적을 다시 점검했다. 그는 상황들이 부조리하고 우연적이며 상식을 벗어나 있다고 생각했다.


바이스의 알리바이가 분명했으니 그녀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논리라면 마리 역시 용의선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그녀도 남편이 죽은 시각에 하늘 위에 떠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직감과 본능을 믿었고 그것으로 마리를 의심했었다. 그렇다면 바이스를 의심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사건 발생 시각에 자신이 직접 그녀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선입견이었고, 마리가 알리바이를 사거나 조작할 수 있다면 그녀 역시 그럴 수 있었다.


맥시마는 바이스의 데이터를 파고들었다. 그녀를 범인으로 의심할 수 없다면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이라도 얻어야 했다.


바이스는 화려한 경력의 여자였고 유럽 대륙의 세 개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다. 27의 나이에 유럽 도시연방은행을 사직하고 본격적으로 로비스트 세계로 뛰어든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도쿄시티와 상해시티 그리고 이 도시를 오가며 동아시아의 굵직한 기업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로비스트로서의 바이스에게, 새로이 부임한 도시경제협력국 차관은 친밀하게 관리해야할 대어였을 것이다. 이 도시에 숨은 어두운 단면들을 알고 있는 맥시마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구린내 나고 노골적으로 악한 거래들이 뒤엉켜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바이스에게는 마리보다 많은 살해동기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녀가 위장한 알리바이의 고전적 트릭 역시 풀어낼 수 있으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맥시마는 그녀의 주위 인물들을 탐문했다. 그리고 주변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거물 로비스트답게 도시경찰청 상부를 통해 내려온 메시지였다. 그녀는 맥시마를 만나고 싶어 했고 자신의 집으로 와주기를 바랐다.


맥시마가 바이스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날 밤의 느낌으로 그를 맞았다. 비록 격식 차린 정장에 예의를 갖춘 로비스트의 표정이었지만 눈빛만은 그날 밤의 바로 그 눈빛이었다. 맥시마는 현재 자신의 위치와 그날 밤의 기억 사이에서 스스로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바이스는 그를 위층 공간으로 안내했고 한쪽에 마련된 바에서 두 개의 언더락 잔에 스카치를 따랐다. 그날 밤의 술이었지만 보다 값비싼 싱글 몰트였다. 그녀가 길고 하얀 손으로 잔을 흔들며 건네자 맥시마가 말했다.


“불안한 모양이로군.”


그녀가 무슨 뜻이냔 듯 그를 보았다.


“도시경찰청 간부를 통해 나에게 연락한 걸 보면 말이오. 내가 당신에 대해 수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 아니오?”


“당신에게 연락할 방법을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고위인사를 통해 연락하는 건, 제겐 아주 익숙하면서도 빠른 방법일 뿐예요.”


바이스가 미소 지으며, 그러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그래,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당신 말대로, 당신이 나에 대해 조사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내 주변 인물들까지 지저분한 것들까지 속속들이 캐고 다닌다더군요.”


“그것이 내 일이오.”


바이스는 맥시마를 살피면서 물었다.


“정말로 저를 범인으로 생각하나요?”


맥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에서 그녀가 불안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 이오리 차관을 죽일 이유가 없어요. 이미 말했지만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해요.”


바이스가 말했다. 맥시마를 떠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 역시 떠보듯 말했다.


“당신은 그를 사적으로 만난 적이 있더군요. 플레이모어 호텔에서.”


바이스의 눈빛이 흔들리면서 맥시마를 외면했고 잠시 후 다시 평정을 찾은 모습으로 말했다.


“도시경제협력국 차관이면 저에겐 아주 중요한 고객이죠.”


걸려들었다.


“그 말은, 당신이 그의 정부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건가?”


“그거야 우리 탐정님께서 조사해보면 밝혀질 문제겠죠? 하지만 저도 이오리 차관의 죽음에 대해 알아봤어요. 저는 그를 죽이지 않았어요. 아니 죽일 수가 없었죠. 그날 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었으니까.”


바이스는 그날 밤의 미소를 보이며 덧붙였다.


“당신은 벌써 잊은 건가요? 난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말예요.”


그는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요.”


“내 알리바이가 확실한데도 저를 범인으로 생각한단 말인가요.”


“알리바이란 간단한 트릭일 수 있으니까.”


“만약 내가 범인이라면, 당신도 범인일 수 있다는 걸 아세요?”


“무슨 말이오.”


“당신 말대로 내가 그날 밤 당신을 속이고 이오리 차관을 죽였다면, 당신 역시 나를 속이고 그 남자를 죽였을 수 있다는 말예요.”


그는 그녀의 속셈을 눈치 챘고 그것을 즐기면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살해할 동기가 없소.”


“그 말은, 제게는 동기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그럼 그 동기는 밝혀내셨나요?”


“아직은. 그러나 밝혀낼 거요.”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죠.”


그녀는 자신 있다는 몸짓으로 술을 마셨다. 맥시마는 그것이 방어를 위한 몸짓임을 눈치 챘다. 그는 술잔을 들었고 잠시 그녀를 살피다가 말했다.


“하나 궁금한 것이 있소.”


“뭔가요, 저스티스……. 저스티스라고 불러도 되겠죠?”


바이스는 그를 사적인 공간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날 밤, 당신 같은 여자가 왜 그런 곳에 있었던 거지?”


“나 같은 여자가 왜, 그런 싸구려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느냔 말인가요?”


“그렇소. 그곳은 고급 로비스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소. 약물중독자들이나 드나드는 곳이지.”


“로비스트란 직업을 얼마나 알죠, 저스티스?”


그는 무슨 뜻이냔 듯 보았다.


“모든 분야가 세분화되고 고착화되면 그 안에서 부작용들이 꽈리를 틀기 시작하죠. 그것은 로빙의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하는 일이, 부적절한 일이란 뜻이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로비스트란 자신과 상관없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사람들예요. 그건 분명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론 더 없이 허무한 짓이기도 하죠.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누구나 돌파구가 필요한 법이고.”


“돌파구라.”


“그래요. 낯선 장소에 홀로 떨어져 모든 걸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제가 제 자신을 지우는 방법이죠.”


바이스는 맥시마를 직시하면서 말했다. 그 순간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고 자신에 대한, 자신의 일에 대한 회한을 털어놓았다. 맥시마는 그녀의 공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처럼 나락으로 떨어진 자이든 스포트라이트 속 삶을 사는 그녀이든, 공허란 누구에게든 비집고 들어와 허무와 무기력함 속으로 떨어뜨리는 법이다.


바이스는 자신만만한 몸짓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 맥시마는 그 손을 움켜쥐었다. 그는 그녀가 용의선상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빠져나가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듦으로서 안전장치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당신 같은 여자를, 예전엔 팜므파탈이라고 불렀다지?”


“고전적인 단어네요……. 마음에 들어요.”


바이스가 미소 지었고 맥시마는 갑작스런 위화감에 휩싸였다. 그는 사건을 해결하고 일을 완성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맥시마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바이스를 뿌리칠 수 없었다.



13.

맥시마는 혼자서 눈을 떴다. 늦은 오전이었고, 일전의 우람한 몸집의 메이드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메이드는 집주인이 아침 일찍 출타했고 손님을 깨우지 말라고 지시했으며 지금은 맥시마를 찾는 손님이 와 있다고 일러주었다.


나를 찾는 손님?


맥시마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는데 침실 문이 열리며 베니마루가 들어왔다. 녀석은 그를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맥시마는 바이스의 집에서 그를 맞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태연히 말했다.


베니마루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자네 차가 어디에 주차되어 있는지 조회해봤지. 럭키 반장이 자네를 찾아.”


맥시마는 순순히 따라 나섰고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스스로를 자제하는 것이 먼저였고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베니마루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도시경찰청 외부인접견실에는 럭키 반장뿐 아니라 마리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맥시마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럭키 반장이 어울리지 않게 웃었다.


“어제 밤엔 수사에 한참이었던 모양이군, 저스티스 탐정?”


“왜 날 찾은 겁니까.”


“내가 먼저 질문을 하지. 사건발생시각 현장에, 그러니까 이오리 차관 집에 간 적 있었나?”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 예상 했지.”


럭키 반장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자네를 못미더워 한다는 것은 잘 알겠지? 나 역시 그걸 감출 생각은 없어. 나는 나름대로 도시경찰청 차원에서 사건을 파헤치며 자네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지. 난 자네에 대해 몇 가지 조사를 했고, 그 중 하나가 자네의 그 구닥다리 차의 블랙박스를 열어보는 거였어. 자네의 행선지들을 파악하려고 말이야.”


“그런데?”


“뜻밖에 재미있는 기록이 나왔어. 자네 차가 사건이 있던 날 새벽 02시 23분에 평택 지구 한 여인의 집에서 출발해 청담 지구로 향했더군?”


맥시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자네 차는 도시로 들어오면서 네 군데 교차로의 감시카메라에 찍혔는데, 시간대별로 청담 지구로 향하고 있었어. 차창은 취침모드로 가려져 있었고 시스템은 이오리 차관의 집주소가 입력된 채 자동운행모드였지. 차는 02시 57분에 이오리의 집 근처 인적 없는 골목길에 멈춰 섰어. 그리고 03시 29분에, 다시 말해 이오리 차관이 죽고 9분 후에 그 골목을 출발해 왔던 길을 되짚어 평택 지구로 되돌아갔어. 이렇게 자네를 불러들인 건, 어찌된 영문인지 사연을 듣기 위해서야.”


럭키 반장은 이제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 말해 보게.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저스티스 탐정?”


맥시마는 뭔가가 잘못됐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함을 느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마리를 보았다. 그녀는 뒤쪽에서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지금,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겁니까?”


“자네가 명확한 해명을 하지 못한다면 그렇지.”


“내가 왜 피해자를 죽입니까.”


맥시마는 직감적으로, 어떤 부조리한 함정에 빠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를 함정에 빠뜨린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그랬단 말인가.


그는 본능적으로 방어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소. 그날 밤 나는 약에 취했고, 그 때문에 비몽사몽간에 차를 탔고, 자동운행모드로 청담 지구까지 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럭키 반장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런 정황만으로 나를 범인으로 단정하는 건 무모한 짓이오. 무엇보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도 못했고 죽일 이유도 없소.”


“그거야 조사해보면 알겠지. 하지만 나는 자네가 아주 영악하다는 걸 알아. 자네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맡았어. 누구든 용의자로 올릴 수 있고 또 제외시킬 수도 있지. 자넨 스스로를 용의선상에 올릴 생각은 아예 안 했겠지? 내가 뒤에서 따로 캐보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테고 말이야. 안 그런가?”


“그건 억지요.”


그는 스스로를 억눌렀다.


“난 내가 이 사건을 맡게 될 지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자네가 그날 밤 피해자 집에 갔었다는 사실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유를 해명하지 못한다면, 자네를 이오리 차관의 살인용의자로 체포할 생각이네.”


그 말은 자신이 이 사건에서 밀려난다는 의미였다. 다시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져 허우적대야 한다는 뜻이다.


맥시마는 마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 역시 혼란스럽군요. 하지만 저는 제 남편의 명예를 위해 범인을 잡으려고 해요. 누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관심 없어요. 저에겐 범인을 체포하는 것만이 중요하죠.”


맥시마는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말하는 건지 궁금했다. 마리가 그를 직시하면서 말했다.


“전에 사건현장에서, 저를 용의선상에 올리면서 당신이 말했었죠? 제가 범인이라도 수사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무슨 뜻이오.”


“저도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말하겠어요. 당신이 범인임을 시인한다면, 그래도 당신에게 수사료를 지불하겠어요. 저는 이 사건을 하루라도 빨리 일단락 짓고 싶으니까요.”


“난 절대로 당신 남편을······.”


“아뇨, 당신이 분명해요. 이젠 저도 확신할 수 있어요.”


젠장. 창은 속으로 욕지거릴 내뱉었다. 함정은 이제 늪이 되어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 여자는 그저 범인을 잡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게 누구인지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리의 눈빛은 확고했다.


“사건현장에서 당신은 나를 의심했었죠? 그건 제가 말 못할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어요.”


“그게 뭐요.”


맥시마가 긴장하며 물었다.


“그건 저에게 의아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부분이었어요. 제가 처음 현장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웠던 건, 남편이 그 시각에 별채에서 풀어헤쳐진 가운 차림으로 죽었다는 사실이었어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경찰에 신고하고 기다리면서, 저는 남편의 죽음에 개인적인 것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여자로서의 직감이었고,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도 발견했어요. 하지만 전 그것을 발설할 수 없었죠. 이오리는 제 남편이기 이전에 지구연방정부의 고위관료였고 그이의 죽음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순 없었으니까요.”


“지금 그 증거가 있단 말이오?”


“그래요, 지금 당신에게서 나는 그 향.”


마리는 침착하게 그를 주시했다.


“제가 그날 아침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당신의 그 향수 향을 맡았어요.”


맥시마는 머릿속이 하얗게 바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하얀 백지 위에서 모든 상황을 다시 그릴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왜 갑작스럽고 부조리한 함정에 빠졌는지를 간파했다.


그는 만족감을 느끼며 마리와 럭키 반장과 그 뒤에 선 베니마루를 향해 시니컬하니 웃어보였다. 그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그는 잠시 그 긴장을 즐기다가 말했다.


“이제, 범인을 보여드리지.”



14.

바이스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녀는 심문실의 차가운 알루미늄 벽 마감과 딱딱한 구조에 불안해했고 맥시마와 함께 들어온 럭키 반장과 베니마루에 대한 경계를 보였다.


맥시마가 말했다.


“바이스씨. 당신은 정식으로 연행된 것은 아니고 임의동행 상태요. 하지만 당신의 답변 여부에 따라 이 자리에서 야가미 이오리 차관의 살인범으로 체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소.”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걸 보면, 그 만큼 확신이 있어서겠죠?”


바이스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거예요, 저스티스.”


“물론 증거는 있소. 이오리의 체내에서 디에틸 프탈레이트가 검출됐거든.”


“그게, 뭐죠?”


“중금속 화학 성분이오. 다량을 섭취했을 땐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하지만 이오리의 체내에서 발견된 것은 해가 없는 정도의 미량이었소. 때문에 나는 그것을 간과했었지. 그때만 해도 그의 사인이 분명했고 나는 그를 죽일만한 동기를 가진 용의자를 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 몸에서 디에틸 프탈레이트가 검출되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소. 그것은 그 화학물질이 몇몇 공산품의 원료로 쓰인다는 사실이오.”


바이스가 이해 못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향수요. 그의 몸에서 발견된 디에틸 프탈레이트라는 성분은 향수의 원료로 쓰이지. 당신 것과 같은, 로즈 향의 향수 말이오.”


“그러니까, 내가 쓰는 향수가 그 사람 몸 안에서 나왔다는 말인가요?”


맥시마는 말없이 고갯짓으로만 끄덕였다. 그것이 그녀를 자극한 것 같았다.


“그런 게 증거가 된다고 생각해요? 같은 향수를 쓰는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어요. 제가 쓰는 향수가 고급이긴 하지만 이미 대중화된 거예요. 아마 이오리 차관의 부인도 같은 걸 쓰고 있을지 모르죠.”


“그 분은 다른 향수를 씁니다. 샤넬이죠.”


곁에서 베니마루가 말했다. 바이스는 당황하며 머뭇거렸고, 맥시마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서 죽은 이오리의 체내에서 그 성분들이 검출되었을까. 나는 당신이 그와 아주 긴밀한 컨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당신은 그를 안심시킨 뒤에 전자충격기로 그의 몸을 지진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억지예요.”


“나 역시, 그것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하오.”


맥시마는 잠시 그녀가 흥분을 가라앉히길 기다린 다음 말했다.


“이오리 차관은 자신의 집 별채에서 죽었소. 그 별채는 인식코드가 주어진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일종의 밀실 같은 곳이지.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밀실에는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소. 그곳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이오리만의 공간이었다는 뜻이오.”


“그게, 그건 또 무슨 뜻이죠?”


“처음 사건현장을 봤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의심한 것은 이오리가 아내가 집을 비운 날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별채에서,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죽었다는 사실이었소. 그리고 그 시각 보안센서는 해제되어 있었지. 그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일 것 같소? 그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요. 이오리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그 손님이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도록 해놓고 말이오.”


바이스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게 저였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바로 당신이오. 하지만 당신이 그를 살해했다고 설명하려면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오. 당신은 왜, 그리고 어떻게 그를 죽였느냐 하는 거요.”


“그래요. 거기에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당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바이스가 맥시마를 노려보았다. 맥시마는 자신이 그녀를 자극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즐기면서 말했다.


“먼저 왜 죽였느냐. 내가 당신을 찾아갔을 때, 당신은 현재 상해시티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했었소.”


“그것은 이 사건과 상관없어요.”


“아니, 분명한 상관이 있소. 그것이 바로 당신의 범행 동기니까. 이오리 차관은 죽기 전 아시아-유럽횡단고속열차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소. 그 사업은 철도가 관통할 도시들이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는 전 지구적 국책사업이오. 특히 동아시아 세 개 도시는 그 기점으로 선택되기를 고대하고 있지. 당신이 상해시티를 위해 하는 일이란 게, 바로 상해시티를 그 기점 도시로 유치하기 위한 로빙 아니오?”


바이스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오리가 도시경제협력국 차관이 된 후 지속적으로 그를 관리했소. 당신이 가진 능력과 매력으로 그를 매수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관리해 왔지. 그것은 이오리가 로비스트로서 마땅히 관리해야 할 거물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분명한 목적은 아시아-유럽횡단고속열차 유치였기 때문이오.”


“그래요. 하지만 그건 로비스트로서 당연한 제 역할예요. 내가 관리하는 사람을, 내가 무엇 때문에 죽인단 말이죠?”


“그건 이오리 차관이, 당신의 예상과는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오. 당신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엄정하고 강직한 관료였소. 비록 미모의 로비스트의 덫에 걸리긴 했지만, 그는 도시경제협력국 차관으로서 자신의 직책의 책임과 아시아-유럽횡단고속열차 사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소. 그는 당신과의 관계와 그 사업을 별개로 생각했을 거요. 그것이 당신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지. 온갖 회유와 유혹과 협박에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을 테지. 그래서 당신은 마지막으로 그를 설득하기로 했소. 그래도 넘어오지 않는다면 그를 죽이기로 계획했고 말이오. 그가 죽는다면 동아시아 담당 차관 임명 당시 이오리와 경쟁했던 상해시티 출신 후보자가 재임명될 가능성이 있었고, 그렇게 되면 당신이 돕는 상해시티가 기점 사업권을 따는데 보다 유리해질 테니까.”


“하.”


바이스가 어이없다는 듯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했다.


“그것 또한 억지 주장일 뿐예요. 당신의 그 무식한 추리가 맞는다고 치죠.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죽였단 말인가요? 어떻게요? 그날 밤 나는 약에 취해 있었어요, 바로 당신과 함께! 기억 안 나나요, 저스티스?”


“그 다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어떻게 죽였느냐 하는 것이오. 그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당신을 만난 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오.”


맥시마는 지켜보는 럭키 반장과 베니마루를 의식하며 말을 이었다.


“이 사건을 맡으면서, 그리고 내 수사 범위 안으로 당신이 들어온 후로 나는 당신에 대한 모든 걸 의심했소. 그 중 가장 큰 의문은, 당신 같은 여자가 왜 그런 싸구려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고, 왜 나를 만났느냐 하는 것이었소.”


바이스가 다시 반발했다.


“말했잖아요, 그건 단지······.”


그녀는 자신의 사적인 치부가 드러나는 것에 안절부절 못했다. 맥시마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말했다.


“당신은 그것이 당신 나름의 돌파구였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주장일 뿐이고 그것을 의심하는 것이 바로 내 임무요. 만약 당신이 이오리를 죽이기로 계획했다면, 그래서 당신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그곳에 간 거라면? 그러면 모든 상황이 퍼즐처럼 한 순간에 맞아 떨어지지.”


그녀는 이미 그 의미를 알아챈 것 같았다.


“당신은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소. 그에게 히드라를 먹이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지. 그러나 약에 취한 그 남자는 당신 역시 히드라를 먹었는지, 아니면 먹은 것처럼 행동했을 뿐인지는 아직도 가물가물하다오. 알리바이를 위해 그를 집으로 데려온 후, 당신은 그가 약에 취해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하곤 이오리에게 메시지를 보냈소. 이오리가 그 늦은 시각에 별채로 간 것은 그 때문이지. 당신은 그 남자의 차를 타고 청담 지구로 향했소. 차 시스템에 이오리의 집주소가 설정된 것은 당신이 그 남자의 차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밑바닥을 헤매던 그 남자의 차는 운전자 인식기능도 없는 구닥다리 차였으니까. 청담 지구에 도착한 당신은 별채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그를 회유했소. 그러나 그는 사업 얘기에는 관심이 없었겠지. 결국 당신은 두 번째 계획을 실행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소. 그가 방심한 사이에 미리 준비해간 전자충격기를 꺼내 그를 죽였고, 이오리의 전화기에서 메시지 기록을 삭제한 뒤에, 그 집을 빠져나가 당신 집으로 돌아온 것이오. 그리고는 다시 남자가 잠들어 있는 침대 속으로 들어갔지.”


“그, 그런 억지가······.”


그녀는 자제력을 잃은 채 흥분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맥시마는 침착해졌다.


“당신이 바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를 이용하려 했던 것은 좋은 계획이었소. 하지만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당신이 고른 그 남자가 바로 나였다는 사실이오. 내가 이 수사를 맡게 됐기 때문에 내 차가 여기 계신 럭키 반장님의 수사망에 걸렸고, 그 때문에 나는 당신에 대한 모든 정황을 재구성하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거요.”


맥시마는 잠시 말을 끊고 럭키 반장을 의식했다. 그의 얼굴에는 맥시마가 범인이 아님에 대한 실망과 사건 해결에 대한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만일 럭키 반장님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이용했던 남자의 차는 그저 청담 지구로 향했던 수많은 차들 중 하나였을 거요. 그리고 그 남자였던 나는, 당신이 새벽에 나갔다 다시 들어온 것도 모르고 당신을 용의선상에서 배제했겠지.”


맥시마는 사람들의 기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말했지만 당신의 계획은 나름 치밀했소. 좋은 계획이었지. 그날 밤 나를 고른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오. 계획만큼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지.”


바이스가 벌떡 일어섰다. 떨면서 맥시마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이었고 분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이제 하이라이트 시간이다. 맥시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가만있을 것 같아요?! 저스티스 맥시마, 당신을 가만 두지 않겠어요.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그녀는 굳어버린 채 말을 잊었다. 문이 열리고 마리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심문 과정 내내 옆방에서 지켜보던 중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새파랗게 질리는 바이스를 보면서, 맥시마는 그녀가 마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낯빛은 자백보다도 설득력이 있었고 럭키 반장과 베니마루는 확신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하이라이트의 주인공답게, 마리는 우아하게 다가왔고 도도하게 바이스를 노려보았다.


“네가, 내 남편과 놀아났던 계집이었니?”


바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차마 마리를 보지 못했고, 그것은 영락없는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마리는 그런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다가 맥시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이스 따위는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전히 우아하고 도도한 몸짓이었다.


맥시마는 마리의 눈초리에서, 어떤 승리의 도취를 엿볼 수 있었다.



15.

그날 이후 바이스의 집에서는 이오리의 넥타이 하나와 사소한 물건들이 몇 개 발견되었고, 그녀가 도시경제협력국 차관과 밀회를 즐기던 장소와 증거들이 차례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 역시 속속들이 파헤쳐졌다. 후속 심문과정에서 궁지에 몰린 바이스는 품위를 잃어버린 채 억지 주장들을 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범인은 자신이 아닌 저스티스 탐정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녀가 알리바이를 만들던 날 밤, 잠결에 맥시마가 침대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그런 주장들을 펼수록 그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저질 로비스트이자 상해시티를 위해 서울시티 출신의 지구연방정부 각료를 살해한 악녀로 묘사되었다.


사건이 정식으로 종결되고 몸에서 공기칩을 다시 제거한 뒤에, 맥시마는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해 청담 지구로 찾아갔다. 서재에는 “Blue Mary’s Blues”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리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고 차를 대접한 뒤에 현금이 든 가방을 내밀었다.


“수사료에 대한 법적 ‘가’ 레벨의 금액과 그이의 진상조사기금은 당신 계좌로 입금했어요. 확인하셨나요?”


“확인했소.”


“이 돈은 정식 계약 이면으로 당신이 요구한, 당신에게 약속했던 나머지 금액예요. 그런데 왜 현금으로 요구한 거죠?”


“현찰이 보다 실감 난다고나 할까요.”


마리는 잠시 그를 주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제 다 끝났군요. 홀가분해요.”


맥시마는 가방 속의 금액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수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느꼈던 건데, 당신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 슬픈 감정을 보이지 않더군요.”


“왜 그래야 하죠?”


맥시마는 그녀를 보았다.


“이오리는 전형적인 서울 남자였어요. 아니 옛날식으로,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죠. 모든 면에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권위적인 남자였어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엄정하고 강직한 공직자 따위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사람예요.”


“알고 있소.”


맥시마가 무심하게 말했다. 엄정하고 강직한 공직자라니. 요즘 같은 시절에, 그런 공직자가 존재하기나 할까.


“그래도 위험한 행동이었소.”


“하지만 당신이 다 해결해 주었잖아요.”


그는 대꾸하지 않고 가방을 닫았다.


“그는 죽어 마땅했어요. 감히 나를 농락했으니까. 자기를 차관 자리에 앉히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런데도 나를 배신하고 그런 계집애와 놀아났죠. 그러니 죽는 게 마땅해요.”


맥시마는 문득 이 도시가 다시 싫어졌다. 그는 이 탁한 도시의 온갖 구린내 나고 노골적으로 악한 것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여자의 질투는 그 중 사소한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당신에게 정말 감사드리고 싶어요. 저스티스 탐정님.”


“그저, 일을 한 것뿐이오.”


마리가 미소를 지으면서, 여전히 그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당신은 왜 그런 위험한 방법을 선택한 거죠?”


“당신은 내게 두 가지를 주문했었지.”


맥시마는 잠시 주저하다가 의뢰인을 보았다.


“첫째, 남편을 죽여야 한다. 둘째, 바이스를 완벽하게 매장시켜야 한다. 당신은 품위를 유지하려 하지만, 당신의 자존심은 그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랬죠, 그래서요?”


“그 조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내가 아닌 제 3자에 의해 이 사건의 실마리가 풀려야만 했소. 그 두 사람의 관계를 연결시키기 위해 당신 남편을 파도록, 베니마루에게 지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바이스와의 알리바이를 만든 내가 직접 그녀를 용의자로 찾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또한 나는 럭키 반장이 나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소. 그래서 그를 이용하기로 했지. 내가 그 여자의 함정에 걸려들었다고 믿도록 만든 거요.”


“당신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면서 말인가요?”


맥시마는 그저 으쓱 했다.


“두렵지 않았나요, 공기칩에 당신의 그런 생각들이 모두 기록되고 있었는데?”


“두려웠소.”


그는 표정 없이 말했다.


“계획이 공기칩에 기록되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평정심을 유지해야만 했소.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궁지에 몰려 있었기에 그 어떤 위험한 일이라도 해야만 했소. 그리고 성공 못할 거라 생각했다면,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요.”


“그래요, 당신은 내가 의뢰한 일을 완벽하게 수행했어요.”


“당신 역시 날 범인으로 지목했던 연기는 좋았소. 나 역시 긴장할 정도였으니까.”


마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돈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녀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방을 나가려는데 마리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맥시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럭키 반장이 미련을 갖고 있는 4년 전의 사건, 그것 역시 당신이 꾸몄던 건가요?”


맥시마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그건 의뢰인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16.

황사가 물러나고 있었다. 거리에는 오랜만에 햇살이 짙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맥시마는 차를 자동운행모드로 전환한 뒤에 테리 보가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이제야 전화한 거야?”


더러운 침대 위에서 웃옷을 벗은 테리는 왼쪽 갈빗대에 골절 패치를 붙인 채였다.


“사람 갈빗대를 부러뜨렸으면 진작 찾아와 사과부터 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서 전화한 거야. 약속했던 돈은 입금했다. 치료비까지 얹어서.”


테리가 히죽거리며 나긋해졌다. 테리는 언제든 잡일이 있으면 또 불러달라고 했고 그는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은 뒤 전화를 끊었다. 앞 차창이 주행모드로 바뀌면서 빛으로 가득한 거리를 보여주었다.


일이, 끝났다.


비로소 그는 긴장을 풀었다. 작은 칩 하나 제거했을 뿐인데도 자유와 포만감이 느껴졌다. 공기칩을 24사간 개방한 채 수사를 벌이는 것은 수많은 관객에게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순간을, 오로지 본능과 직감에만 의지하면서 스스로를 부유하도록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럭저럭 해내었다. 그에 따른 합법적인 대가와 이면계약의 보상까지 받아냈다. 게다가 그 일은, 그에게 스릴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히드라의 흥분 상태에서 이오리에게 전자충격기를 지져대던 순간을 떠올렸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터뜨리던 비계덩이의 입안에 바이스의 집에서 가져간 향수를 분사하던 순간. 그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희열과 흥분을 느꼈다.


그는 황사가 걷히고 환하게 빛나는 거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내동댕이쳐진 안개 속에서 벗어난 것인가?


도시경제협력국 차관 사건의 해결은 자신의 싸구려 사이트에도 괜찮은 이력으로 남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탐정 저스티스 안에 숨어있는 청부업자 저스티스. 그를 적절히 활용한다면, 다시는 현실의 나락 속을 헤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었고, 이제 그는 그 능력에 대한 자신감까지 얻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청부업자 저스티스. 탐정 저스티스는 아이들 만화에나 나오는 유치한 이름이었지만, 청부업자 저스티스는 아주 부조리했기에 그만큼 더 현실적이었다. 그는 차를 다시 수동모드로 전환한 다음 기분 좋게 액셀을 밟으면서 되뇌었다.


"Justice Maxima,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드립니다·····. 그 어떠한 문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