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현수막의 이념은 작동되지 않는, 아름다운 이념이다. '색깔론'의 이념은

구체적으로 작동되는, 더럽과 강력한 이념이다. 그리고 그 여러 이념들은 그것

을 표방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우월성 과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

실, 이런 공허감은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진실로

선한 의지가 살아 있는 것이며, 그 선한 의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믿는다. 어느 쪽이냐를 따지기를 좋아하는 당신

들은 또 그렇지 않다고 삿대질을 해댈 테지만 말이다

                                                                                        『이념』中


하루 종일 봄 산의 언저리와 강가를 자전거로 쏘다니고 나면, 내 피부에 나무처

럼 엽록소가 생겨서, 수고하지 않고도 빛과 더불어 온전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환각에 빠진다.

그 때 숲 속에서 오줌을 누면 초록색 오줌이 나올 것 만 같다.

그러나 강가를 쏘다니며 적는 이런 글은 스스로 그 피부에 엽록소를 지니지 못

한 자의 결핍일 것이다.

                                         『꽃은 꽃 한 송이로서 아름답고 자족하다』中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

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

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밥'의 대한 단상』中

인간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던 인간들이 어째서 한바탕 '본때' 를 보이

고 나면 비로소 말을 알아듣는 것일까. 기어이 '본떼'를 보여야 명백히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 '본때 보이기' 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인지, 다른 길은 정말로 없는 것인지, 말의 힘과 말의

소통능력으로 현실을 조금씩 바꾸어나갈 수는 없는것인지........ 흙먼지 속에

서 마감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늙은 기자의 노래』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