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길가를 내다보는 창이 맑게 보이는 누나의 책상은 누나가 떠난
뒤에도 항상 깨끗합니다. 가끔 엄마가 누나 방을 치워 준다는 이유도 있
지만 그 외엔 아무도 이 방에 얼씬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냥 싸늘하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분위
기를 자아냅니다. 누나가 쓰던 휠체어는 방 구석에 놓여있습니다. 달력
옆에는 전에 누나가 사서 걸어 놓은 장미꽃 몇송이가 마른 꽃잎을 아슬
아슬하게 벽에 기대고 있습니다.
별 내용도 없는 누나의 일기장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누나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게다가 허약한 몸 때문에 여러가지 병에 시달렸습니다. 항상 창백한 얼
굴이었지만 동생인 나에게 미소를 잊지 않았구요.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면 다 마찬가지이지만 누나는 삶을 자각할 때부터 죽음을 생
각해야 한다는 비극이 있었던 것인가 봅니다. 아무튼 난 며칠 전부터 누
나의 일기장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방에 앉아서 음악을 듣거나 책
을 읽거나,아니면 엄마하고 가끔 공원에 가거나 하는 일 외에는 거의 종
일을 집에 있는 누나의 일기장은 내가 생각 했던 것처럼 별다른 이야기
가 없었습니다.
그냥 죽은 누나의 체취가 어려있는 방에 잠깐잠깐 들어와서,침대에 한
번 누워보기도
하고,,그러다가 잠이 들기도 하고 했습니다. 워낙 누나는
말도 없고 또 집에서 죽은 듯이 살던 사람이어서,,이 세상에서 떠난지
한달이 넘은 지금도 난 누나가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합니
다. 그레서 가끔 방을 어정대기도 하다가..그러다가 우연히 누나의 일기
장을 발견하고 읽게 습니다.
다섯권의 일기장을 누나의 책꽂이 한 구석에서 찾아내고,그리고 이제
세권째 읽고 있습니다. 누나는 워낙 일상이 단조로왔나 봅니다. 내가 아
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들,아무렇지도 않게 뜨고 지는 해와 달,별,하늘의
구름,,누나는 가끔씩 하늘의 색이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대해서 한페이지
이상 쓴 적도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누나같이 지
루한 삶은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늘이 그처럼 많은 색을 가진다는 생
각이 듭니다. 아울러 구름과,바람과,별 그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비
록 좁은 남쪽 창을 통해서이지만.
난 세권째 일기장을 읽으면서 우연히 그 다섯권의 일기장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누나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결과일지도 모
릅니다. 세권째 일기장까지 누나는 그 두꺼운 일기장의 끝까지 쓰지 못
했습니다. 삼분지 이 쯤 쓰다가는 그만 모두 허연 백지가 이어집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일기장에 새로운 날짜들을 적어가고..하는 식입니다.
누나의 삶의 단위는 그렇게 두꺼운 일기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채워갈 수
있을정도로 풍요롭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하긴 남쪽 창을 통해서 시작하
고 끝맺는 하루하루를,,글쎄요..그 일기장에 대 채울려면 지겹고..어쩌
면 누나는 새로운 일기장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날들을 소망했는지도 모
릅니다. 그건 누나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인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새로운 날을 소망하지 않으면 아마 누나의 그 좁은 방,좁은
창으로 보이는 하루하루가 엄청나게 지루했겠지요..
누나는 가끔씩 일기장 구석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참새들,뜨는
해들,전기줄,지나가는 사람들..그리고 간간히 나오는 푸념같은..걷지 못
하는,남들처럼 건강을 가지지 못한 자의 신음같은 이야기들.. 누나는 생
전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누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습
니다. 누나 대신에 엄마가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끔 누나는
엄마가 누나 때문에 울던 날에 자주 쓰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년 ##월 $$일 날씨 ..그래도 하늘은 나에게 밝은 태양을..
고통받은 자들은 고통을 소리 높이 외쳐야 하는건지... 난 오늘
도 남쪽 작은 창에서 세상을 소망하며,상상하며,참새때들이 간간
히 날아가며 해주는 이 세상의 이야기들을 들으려고 애쓰며 지냈
다.
눈물을 흘리는 것,슬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간 뿐이라면 이
세상 모든 것들도 슬프다는 표현을 눈물 아닌 어떤 것으로 할까..
저 하늘도,아침과 저녁에 빛이 다르듯이 어쩌면 순간순간 슬픔의
빛으로 나에게 이야기 하려는 것일까.. 왜 인간은 슬픔을 슬픔처
럼,고통처럼 울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오늘도 날 목욕시
켜주고 나서 왜 울었다.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엄마는 울먹이
는 소리로 또 같은 말을 했다. 왜 나는 아무런 슬픈 표정을 보이
지 않냐고. 엄마는 나보고 한번쯤은 울어보기라도, 아픈 다리로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싸안고 온 세상을 향해 한번 울어보기라
도 하라고 한다. 엄마는 내 창백한 웃음이 보기 싫다고 하신다.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이 보기 흉한 두다리로 울어왔는데..더
이상 울어볼려고 해도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모르는 나를 엄마는
알까.. 오늘도 새벽 해가 뜰 때 쯤이면 괴로운 청소 리어카를 끌
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좀 있으면 신문돌리는 아이
와..그리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사람들..그들은 모두
날 대신해서 울어주고 있는데..이 남쪽 창을 통해서 보는 모든 것
들은 세상이 날 위해 대신 울어주는 눈믈들이라고 생각해왔다. 아
니면..어쩌면..나에게 이 남쪽 창이 없었으면 내 몸에 있는 것들
이 다 나의 눈물로 빠져나갔으리라. 몇일 밤을 새워도 다 흘리지
못할 눈물로..인간에게 이처럼 많은 눈물이 있을까 하고 생각 할
만큼 내 속에 많은 눈물이 있지만 난 남쪽 창에서 보는 모든 것들
로 인해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있다. 엄마는 날 언제나
이해해줄까...
누나에게 이 남쪽 창은 정말 소중했던 것일까... 그래서 누나는 겨울
에도 이 남쪽 창을 비닐로 봉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인가봅니다. 책
상에 팔을 괴고 있으면 길건너 아파트가 보이고..그리고 저녁이되면 불
들이 하나 둘 켜집니다. 누군가가, 또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세상은, 저 아파트 불빛 처럼 많은 눈물들일까
요..?
****년 &&월 ##일
날씨 -- 도시의 오염된 공기가 아무리 탁해도 뜨는 해를 막을
수는 없다..나는 이 남쪽 창을 통해 배운다. --
이 창, 2층 높이니까 바닥까지 한 5미터 정도 되려나.. 일전에
뿌린 채송화씨가 싹이 텄다. 이 높은 곳에서 그냥 무심하게 떨어
뜨렸는데도 채송화씨는 보도블럭 구석 그 조그마한 흙 틈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남쪽 창에 또 한 식구가 느는 샘이
다. 채송화를 보며 난 그 채송화가 여기 2층 방 창문까지 자랄 수
도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소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헛된 소망...
소망... 아무도 나의 소망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누군가
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 맞은편 아파트의 불빛처럼 수많은
눈물들이 인간에게 허락된 것처럼 그만큼의 소망도 허락되지 않았
을까..?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그러나
아주 가까운 곳에 나의 소망이 있더라도 난 이 남쪽 창에 가득한
눈물과 항상 함께 해야하는가보다.
오늘, 그냥 무덤덤한 마음으로 채송화 꽃에게 바라는 것은...
그 많은 씨들,어쩌면 싹도 피우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그 많은
씨들에게,,엄마 채송화는 하나하나 각기 다른 소망들을 품게 해
주었으면..보도블럭 구석에 뿌리를 내리는 채송화지만 겨울이 지
나면 죽어버린다는 것 하나 때문에 그 많은 씨앗이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새삼 가슴아픈
눈물처럼 다가온다..
내년에도 또 채송화 씨를 뿌려야겠다....
내년 봄에는 이사를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나의 방도 없어진다고
합니다. 엄마도 더 이상 자꾸 죽은 누나를 생각나게 하는 이 방이견디
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한때는 누나의 존재 자체는 우리 집의 슬픔 덩어
리였지만 죽고 나서 엄마는 더 누나를 생각하는게 당연한거지요. 사람이
란 그런거지요..그렇습니다. 누나는 일기장에 남쪽 창으로 보이는 그 모
든 눈물들을 감당하고 살았는데 나는, 엄마는 그 남쪽 창보다 더 넓은
세상을 항상 대하고 있는데,,슬픔이 그리움으로..그리움이 또 새로운 슬
픔으로 변하는 것이야..하늘 색이 수시로 변하는 것과 같겠지요.
누나는 새로운 채송화씨를 뿌리지 못했습니다. 그건 참 아쉬움입니다.
아니, 누나가 새로운 채송화씨를 뿌렸다면 누나는 이 세상에 새로운 눈
물을 한방울 더 만든 격이라고 생각합니다,누나의 말에 의하면..
****년 &&월 ##일
날씨 -- 오히려 비는 이 세상의 눈물을 감추어 준다. 흘러 내
리는 모든 것들을 체념하게 한다. 하지만 아니야,,아니다..정말
아니다.. 내 남쪽 창에서 그 나름대로의 배역을 항상 맡고 있는
저 태양과 구름과,,아파트 불빛, 그 안에 사는 외롭고 즐거운 사
람들..또 아스팔트 길,멀리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그리고 지나가
는 모든 사람들,,사람들,,그들이 연기하고 있는 연극은 모두 비극
이다. 비극..지금 비의 커튼이 잠시 막과 막 사이의 휴식을 주고
있지만..또 다시 시작되는 비극은 그 자체가 슬픈 눈물이다. 사람
들은 비를 보며 눈물을 생각하지만 언젠가 그들도 이 비극의 뜻을
알게 된다면,,왜 주인공이 마지막에 슬픈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면 그들은 눈물을 보면서 비를 생각하게 되겠지..
오늘은 남쪽 창이 비때문에 가렸다...엄마의 눈물이 생각난
다...채송화는 비를 맞고 있겠지.. 이 비극의 세상에 또 너는 무
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어쩌면 너는 무대 뒤에서 혼자 울어대기
만 하는 뜨내기 연극배우가 아닌지..해가 가면 또다시 씨를 뿌리
며 언젠가는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함께 엉엉 울어보기만을 기대
하는,,그런 삼류 뜨내기 배우..꽃술 가득히 이제는 씨를 품어 무
거운 허리를 지탱하기에 힘들기만 한 네 모습이 나를 원망하는 것
만 같구나..그래 난 너의 눈물을 아니까..난 네가 무대 뒤에서 울
어도 따라 울수 있으니까..너의 씨가 이 땅 어디엔가 가서 퍼져..
또 그렇게 울어도 그 울음을 다 울어줄 수 있을거야..사랑하는 내
채송화..
난 가끔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누나의 방에 들어가서 일기장을 보았습
니다. 누나는 떠났지만 그 슬픔이 베어있는 누나의 일기장을 볼 때마다,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곤 했습니다. 나도 누나처럼
남쪽 창을 통해 세상이 인간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눈물에 젖어보려고 했
지만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누나의 남쪽 창은,가끔 초겨울 바람
에 너무 차게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 슬픔을 덜어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나의 일기장은 너무 슬프기만 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렇게 세상의 눈물만을 보며 살아가기는 너무나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
각이 들 정도로,,누나의 일기장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난 그게 참 안
타까왔습니다. 그리고 좀 이상했습니다. 난 누나의 그런 슬픔 뒤에는 꼭
그 슬픔 만큼의 소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그런 소망이
없다면..누나는 일기를 쓰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기
는 소망을 가진 자만이 쓰는 건데..그래서 어쩌면 누나는 인내로,끈기로
일기를 써내려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매번 그 슬픔에 지쳐,소망 없
는 슬픔에 지쳐 일기장을 다 쓰지 못하고 백지를 남길 수 밖에 없었는지
도 모릅니다.
난 네번째 일기장을 읽었습니다. 또 반쯤 가서 백지가 나왔습니다. 백
지들을 몇장 넘겨보다가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다섯번째 일기장을
볼까 하다가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은 그정도의 슬픔만으로도 위로
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이사가는 날까지는 충분히 다섯번째 일기장도
다 읽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섯번째는 아마 반도 안썼을거라
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일기장이니까요. 누나의 마지막 일기장..난 그
누나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이제는 희망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습
니다. 내 마음 안에서 누나의 형상이,,비록 지금은 죽었지만 슬픔으로만
아로새겨진다는 것은..참 가슴아픈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좀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 창백한 미소와 함께,,슬픔..너무나 슬프게 살아
왔던 슬픔..하지만 그에 비해서 난 누나의 눈물을 한번도 볼 수 없었
고..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지만,,그래서 더욱 더 마음 속에서 지워질 수
가 없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나도 누나의 다섯번째 일기장까지 다 읽고 나면,,봄이 되고 새
집에 이사가면 보도블럭 틈에라도 싹이 나게 채송화씨를 뿌리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그건 감기보다,,이 세상 어느 질병보다 더 지독한..슬픔의
병이니까요..그건 누나의 일기장에서 나온 말이였습니다. 슬픔의 병..
****년 &&월 ##일 날씨 -- ...
요즘은 밤새 깨어있는 날이 많아졌다. 고통이 너무 심해졌다.
숨이 가끔 가빠오기는 하지만..그래도 누워있다가 가끔씩 이렇게
남쪽 창을 대하는 것이 고통보다는 만족한 슬픔이다.
의사는 진찰을 하고,,또 약을 주고..그 하얀 봉지에 든 약을 통
해 사람들은 슬픔의 병을 옮기고 다닌다. 내가 아주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그약을 먹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슬픔의 병에
걸려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모두들 약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 남쪽 창은 언제나 슬프다. 오히려 그 하얀 약 때문에,,모든 병
을 고쳐줄 것 같은 약 때문에 언제나 좌절하고 실망한다.
하지만 난 또 약을 먹었다. 이제는 너무 무미하고 무의미하다.
슬픔을 이길 것은..소망..희망...난 언제나 다다를 것 같이 새로
운 소망을 가지고 또 시작하고..하지만 다다를 수 없는 것은 그냥
놔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약을 먹고 치료되지 않은 병,그 슬픔
의 병일바에야..그냥 놔두는 것이..그레..좋겠지..
누나의 일기장에서 그나마 희망에 관한 말이 있는 것은 이 일기 뿐이
였습니다. 그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누나가 지금까지 적어 온 슬픔의
깊이에 비하면 너무나 간단하고..이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여겨집니
다. 난 다섯번째 일기장도 반도 안되서 백지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만
책꽂이에 넣어버렸습니다. 며칠 후에는 이사를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누
나의 책상,,책꽂이,,그리고 휠체어도,,모두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봄에는..봄에는 새로운 채송화씨를 뿌려야 하니까
요..비록 누나는 누나의 삶과 죽음 처럼 일기장도 아무런 희망이 없이
슬픔만 주고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이제는 누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까닭 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남쪽 창을 보면
서 눈물에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아파트 불빛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나는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짐을 차에 옮기
고..워낙 단촐한 식구라..누나 때문에 그나마 넓은 2층집에 살았지만 이
제는 좀 아늑한 곳으로 옮기고,,그리고 누나의 슬픔이 씻겨진 곳으로 간
다는게 한편으론 편하기도 했습니다.
누나가 보던 책들은 다 팔아버린다고 했습니다. 그 때 밖에는 벌써 고
물장수가 좋은 벌이가 생겼다고 와 있었습니다.
책들을 노끈으로 묶어 정리했습니다. 시집과,,그리고 소설책들..난 마
지막으로,,누나의 일기장까지 묶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비록 끝까지 쓰지 못한 일기장 이였지만,,하지만 슬픔만 남
을 것이라면 그냥 떠나가게 하는 것이 좋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쌓아놓았던 마지막 책 더미 위에 일기장 다섯권을 올려 놓으니 노끈이
좀 모자랐습니다. 노끈을 가지러 가다가 그만 책 더미를 건드려 책이 쓰
러졌습니다. 그통에 맨 위에 있던 누나의 일기장이 방바닥에 떨어지며
다섯번째 일기장의 맨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 졌습니다. 낯익은 누나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난 그때까지 누나의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
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중간마다 가서 끝나는 누나의 일기장은 나에게
누나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누나가 무언가를 써 놓았으리라는 생각
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난 방 바닥에 앉아 그 마지막 페이지를 읽
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일기장에게..
또 다시 남쪽 창을 보며 일기를 쓴다. 사랑하는 내 일기장.. 매
번 일기를 쓸 때마다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쓰고 시작하는데..일
년이 삼백 육십 다섯날이고,,이 일기장이 두꺼워야 삼백장도 못되
는데..내 소망은 그 삼백 날을 가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버린다.
또 다시 일기를 쓰면서..난 새롭게 소망을 한다. 내 사랑하는 일
기장..너만 알고 있으리라 믿어. 넌 나와 함께 이 남쪽 창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친구니까.. 지금은 네가 이 습기찬 책꽂이 구석에
있지만..내 몸이 건강해 지는 날에는 어디 좋은 곳에 있을거야.
세계일주를 너와 같이 할 수도 있고 저 멀리 보이는,,,남쪽 창에
서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너와 함께 갈께.. 너는,,그냥..네 하얀
마음으로 나의 눈물을 받아주기만 하면돼. 그냥,,이 마지막장에
내가 말하는 소망을,,내 몸에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내 소망을
못들은 척 간직하고 있다가..그냥 내가 세상을 보며 흘리는 눈물
을 그냥 받아주기만 하면돼..난 지금 이때밖에 눈물을 흘릴 수
없단다..내 일기장아..난 남쪽 창을 보며 세상이 흘리는 눈물을
생각하지만, 너의 마지막 장을 대하면서 나는 이제 내가 매일 남
쪽 창을 통해 보는 세상처럼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거든..세상은
지금 남쪽 창을 통해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 있어.
사랑하는 내 일기장..내가 너에게만 나의 소망을 말하는 것은,,
나의 소망 때문에 또 다른 더 많은 슬픔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
이야.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은
거,,너도 알고 있지..그렇지.? 하지만 그들도..그 소망 때문에..
슬퍼질 수 밖에 없는걸 어떻게..매번 나는 일기를 쓰면서 마지막
장에만 곱게 적어둔 내 소망을 다시 볼까 두려워서 끝까지 쓰지
못하고 널 책꽂이게 꽂아두지만..또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소망으
로 시작하지 않으면 난 이 조그마한 남쪽 창을 통해 보는 슬픔조
차 견딜 수가 없는걸..
사랑하는 내 일기장..이제 또 다시 너와 같이 남쪽 창을 보게
되었어. 미안해..너까지 슬프게 하려는 것은 아닌데..너는 꼭 내
소망까지 간직해줘..사랑하는 내 일기장..
군데군데 누나의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글자가 있었습니다. 난 떨 리는
손으로 다른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도 펼져 보았습니다. 모두,모든 일
기장이 마지막 페이지를 같은 글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누나의 소망은
너무 상처받기 쉬워서 그렇게 마지막에 감추어 두지 않으면 금방 상처받
아 사그라들었을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난 왜 그때까지 누나가 마음
의 상처받기 쉬운 소망을 일기장 마지막에 숨겨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삶의 소망들이 이미
상처받았기 때문에 난 누나의 소망을 가늠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어쩌
면 누나처럼 순결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누나처럼 깊은 슬픔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일까요..
난 누나의 일기장을 가슴에 꼬옥 품었습니다. 누나의 소망까지 품었습
니다. 남쪽 창 너머로 세상이 나와 함께 눈물을 흘려주고 있던 그날은
이사가는 날, 늦겨울 오후였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고..난 채송화씨를 뿌렸습니다.
처음에는.. 비밀글이었으며.. 난... 쭉 내렸다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