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년 전이다. 내가 갓 가수가 된지 얼마 안 돼서 SM사에 올라가 살 때다.

SM사에 왔다가는 길에, 락 음악 테이프를 사기 위해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SM사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락 음악 테이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락 음악 테이프 사 가지고 가려고 녹음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를 것 같았다.


"얼마 알아보고 왔소?"

"한 개에 5천원 아닙니까?"

"한 개에 만2천원이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다른 곳은 5천원이던데..." 했더니,

"테이프 1 개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싸가x 없는 노인이었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불러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노래를 뜨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 부르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7옥타브 부르고 샘플링하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가성으로 녹음하면 다 될 건데, 자꾸만 반가성으로만 부르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TV에서 "SBS 인기가요"를 방영할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반가성 안하고 공테이프로 녹음해줘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녹음할 만큼 녹음해야 평판이 좋지, 마이크에에 괴성 부른다고 평판 좋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녹음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무뇌충이시구먼,

SBS 인기가요 한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방영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불러 보시오"

"글쎄, 7옥타브를 안 하면 점점 녹음이 안되고 씹힌다니까. 락이란 제대로 불러야지,

부르다가다가 목쉬면 안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노래 부른것을 숫제 되감기고

태연스럽게 마이크를 켜고 뷁이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흥분해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테이프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테이프다.


방영 시간을 놓치고 녹화본을 봐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뇌충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SM사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뇌충이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뇌충이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SM사에 와서 테이프를 내놨더니, 돈수만은 멋지게 불렀다고 야단이다.

라이브한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돈수만의 설명을 들어 보니,

라이브로 부르면 얼마 못 가서 테이프가 재생 잘 안되다가

테이프가 심하게 씹히며, 무리하게 재생을 시키면 평판이 안 좋고

청취율이 끊기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테이프는 고급 라디오에

스카치 테이프 접착 방식 레코더를 사용해 뽕짝으로 불러 좀체로 씹히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테이프는 한번 테이프가 씹히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테이프를 녹음할 때 미리 녹음한걸 재녹음한 뒤에 노래가 제대로 녹음되었는지

확인을 한 뒤에 비로소 굽는다.

물론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라이브로 직접 굽는다.

금방 굽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듣지도 않는 것을

몇 시간씩 걸려 가며 노래 부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CD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중고 CD를 사면 보통 것은 얼마,

립싱크는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라이브는 세 배 이상 비싸다.

라이브 다른 중고 CD에서 떼어낸 뽕짝 멜로디가 아닌 신종 가요인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라이브인지 립싱크를 한건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뇌충이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라이브를를 할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녹음을 하는 그 순간만은 오직 청취율 좋은 테이프를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테이프를 만들어 냈다.


이 테이프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가수에게 뇌충이 소리를 듣는 세상에서, 어떻게 잘 돌아가는 테이프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최신 마이크에

오이 3개도 선물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단속이 떠서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SM사을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공에 무너질 듯한 SM사 밑으로

한 개가 벽을 뚫고 있었다. 아, 그때 그 노인이 저 개쉑기를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테이프를 녹음하다가 우연히 DC사의 마스코트인 개벽이를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그랫쿠나 무서운 쿠믈 쿠엇쿠나!"

초난강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SM사에 들어갔더니 동료 가수가 다른 테이프로

내가 준 테이프를 굽고 있었다. 전에 HOT 음악을 테이프로 녹음하던 생각이 난다.

HOT 테이프도 구경한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HOT 테이프 전시리즈 판다는

메일도 날라 오지 않는다. "원 폴 더 투,투 폴 더 올"이니, "마음 속 그대 그려요"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년 전 테이프 녹음하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출처:바로 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