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 28분.
기차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자취도 남기지 않고 기차에 승차했다.
"서울행.서울행 막차 출발합니다."
"스톱,잠깐만요,잠깐."
차를 놓치면 안된다는 듯이 막 뛰어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젊은이,차표요,차표."
급한 마음에 벙어리 장갑까지 끼고 있으니 쉽게 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출발"
역장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다.젊은이는 벙어리 장갑을 모두 벗어 잠바 주머니에
넣고 겨우 차표를 찾았다.
"위험해,젊은이"
역장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젊은이는 출발하는 기차를 향해 뛰어갔다.그때 젊은이의
주머니속에 있던 벙어리장갑 한 짝이 떨어졌다.젊은이는 그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뛰어갔다.역장이 그 장갑을 주워 들었을 때는 저 멀리 기차의 기적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원,뭐가 저리 급하길래......."
백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젊은이는 자리를 잡고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두사람이 앉는 의자를 혼자 차지한 그는 피곤한 듯 잠을 청하려 하였다.
눈을 감아도 왠지 모를 설레임에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안 주머니에서
편지인 듯한 종이를 꺼내 펼쳤다.그의 친구,요섭이라는 친구가 보낸 것이다.
'무정한 친구'로 시작한 이 편지에는 연락하지 않았던 점을 꾸짖으며 난희가 몹시
아프니 지금 잔소리 말고 받는 즉시 뛰어오라는 내용이었다.
백경은 편지를 가슴에 대고 조용히 지난 날을 생각하는 듯했다. 동호,요섭,규식,
백경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사귄 친구들이지만 서로를 신뢰하는 친구들이었다.
고2 겨울방학 때 요섭의 소개로 네 명은 미팅을 하게 되었다. 동호,요섭,규식은
활발한 성격 때문인지 잘 되었으나 백경만은 두번째 만날 때 여학생이 나오지
않았다.백경만이 혼자 돌아가게 되어 6명 모두가 미안해 할 때 규식이의 파트너인
미선이라는 여학생이,
"난희를 소개시켜 주자."
라는 말을 했다.요섭이가 놓칠 리 없었다.
"난희가 누군데요?"
이때,요섭의 파트너 은정이가 끼어 들었다.
"아냐,그 애는 안돼."
"왜?"
"하여간 안돼."
백경의 친구 셋은 은정과 입씨름을 하기 시작했다.입을 다물고 있던 동호의 파트너인
영해가,
"실은 그 앤 다리를 좀 절어요.그래서 우리가 자신있게 소개를 못 하는거예요."
"지금 제가 찬밥 더운밥 가리게 됐습니까? 괜찮으니 다리 좀 놔줘요."
여학생들은 서로 이야기하다가 은정이가 전화하기로 했다.
"난희니?,지금 좀 나와라.괜찮은 바지씨가 널 기다려."
바지씨라는 말에 백경은 미소를 짓는다.
"응,그래. 거기 자동판매기 앞에. 응, 빨리와."
백경은 XXX 공원 정문에서 다섯번째 있는 자동판매기 앞에 서있다.
동전을 많이들고서.
"바지도 콜라를 마시나요?"
은정이가 가르쳐 준 접선 암호다.
"토끼와 함께 마시죠."
"제가 토끼예요."
웃으며 대답한다.백경은 그제서야 그 여학생을 자세히 보았다.꽤 괜찮은 얼굴이다.
키가 좀 작지만 호수같이 맑은 눈이 참 인상적이다.
"채 난희?"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참 인상적인 눈웃음이다.
"안녕하세요.전 백경입니다.경사가 백번 일어나라고 붙여진 이름이죠."
백경은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예쁘다고 말할 정도의 얼굴은 아닌데도 국민학교
졸업후 처음으로 여학생을 대하니 그의 눈에는 천사처럼 보였다.여자앞에서는
남자들이 용감해지는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정도로 백경 자신도 놀랐다.
그는 그 여학생을 아주 잘 리드하고 있었다.그들은 공원을 거닐었다.
백경의 생각 밖으로 다리를 그리 심하게 저는 것은 아니었다.도리어 더 잘 해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 여학생에게는 대단한 열등감으로
작용하는 듯 했다.
난희가 집에 일찍 돌아가야 했으므로 그들은 일찍 헤어졌다.
"저,일찍 헤어져서인지 아직 그쪽을 잘 모르겠는데 ,저어~ 그냥 간단히 애프터를
신청해도 될까요?"
어렵게 말했다.난희는 의외라는 얼굴로 약간 망설이다가,
"예,좋아요."
그들은 시간약속을 했다.백경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하지만 '다리만 절지 않으면
나무랄데가 없는데......'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후에도 여러번 만났다.요섭이를 포함한 세명의 친구들은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준 죄로 백경으로부터 매일 난희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겉으로는
'그만하라'고 하지만 그들도 밝아진 백경의 모습을 보며 좋아했다.
철마는 계속해서 달렸다.하지만 백경의 마음엔 달팽이를 탄 듯했다.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있었다.백경은 많은 별들 중 작은 별 하나가 맘에 들었다.
난희처럼 작은 별이.기차는 호수를 끼고 돌기 시작했다.밤 낚시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호수 근처의 반짝이는 불빛이 백경에게는 한강 고수부지의 가로등
불빛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백경은 난희와 함께 한강 물을 바라보며 앉았다.
"난희야 오늘 너무 늦은 것 아니니?"
"됐어.집에선 버린 자식인데 뭐."
"하하.그럼 버린 자식둘이 잘 만났네.하하하.하지만 지금 9시가 좀 넘었는데?"
"그래? 그럼 30분만 있다가 가자."
둘은 한강을 바라보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자신의 미래상을 포함해서.
"날짐승은 참 좋을거야.자기가 가고 싶은 곳은 아무데나 갈 수 있으니까.
난희는 어떤 동물을 좋아해?"
"토끼.난 이담에 토끼농장 여사장이 될거야."
"그거 참 맛있겠네."
"어머,야만인처럼 토끼를 어떻게 먹니.그 귀여운 것을."
"먹는 이야길하니까 생각났는데,너 사마귀가 교미를 끝내고 뭘 먹는지 아니?"
"뭘 먹는데?"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암수 사마귀가 교미를 마치고,암놈은 자식을 낳을 때 필요한 영양분을 얻기 위해
숫놈을 잡아먹지.난 암놈이 숫놈의 머리부터 먹기 시작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어."
"어머,어떻게 자기 남편을 먹니? 그보다 남자 사마귀 정말 멋있다.자기 2세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다니."
"난 커서 널 위해 숫놈 사마귀가 되줄 수도 있는데.난 그만큼 네가 좋거든."
"치~"
하는 난희의 얼굴엔 싫은 기색이 없었다.
"넌 어떤 꽃이 좋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난희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음.너 물망초의 꽃말 알아?"
"꽃은 본 적이 있는데 모르겠어."
"나를 잊지 마세요.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너 나 매일 생각해야 돼."
"치.뭐,자기가 내 님이라도 돼나."
"넌 어떤 꽃이 좋아?"
"목련"
난희의 살결에 맞는 하얀 꽃이다.
"그 꽃은 일찍 피고 예뻐서 나도 좋은데,그것은 너무 일찍 지잖아."
"그래 맞아.너무 일찍 진다."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꽃은 장미.사랑을 나타내는 꽃말도 좋지만,향기와 붉은
모습이 너무 예뻐."
백경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너 그럼,넌 덩쿨만큼 사랑한단 말야?"
"나도 장미 덩쿨이 좋아."
난희의 대답에 재치있게 받아 넘기는 자기 자신이 대견스러워진다.
"아,아니야....."
놀라 떠듬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백경은 차를 바꿔타기 위해 중간역에서 내렸다.요섭의 편지에 요양차 충청남도
외가댁에 있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대전행 몇 시에 있습니까?"
"지금이 3시 48분이니까,2시간 정도 지나야 차가 있겠는데."
"어휴,2시간이나.뭘 하지."
"다방이라도 들어가게.대합실에서 기다리기엔 너무 추울테니."
백경은 밖으로 나왔다.심야다방이라도 찾을 생각이었다.백경은 야간영업을 하는
cafe를 찾았다.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그는 간단히 먹을 것을 부탁했다.
식사가 안된다는 것을 돈을 더 주고 갖고 오라고 했다.종업원 아가씨가 가고 나서야
백경은 비디오를 틀어 놓은 것을 알았다.성인용 비디오였다.cafe안에는 중고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많이 눈에 띄였다.
"너 정말 괜찮겠어? 지금이라도 자신없으면 후퇴해."
"너는?"
"나? 난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꼭 볼거야."
백경은 집에서 외아들이라 과잉보호를 받아서인지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다는 것을
알고 동호가 놀렸다.
"백경은 아직 성인영화 한번 못 봤다며? 아직 어린애야."
"정말이니? 우와,역시 병아리구나."
"뭐,병아리?"
규식이의 맞장구에 백경은 화가 났다.
"야,너희들 여학생들이랑 본 적 있어? 없지? 없지? 난 다음 주에 난희랑 극장 가서
'XX'를 보기로 했다고."
"에이,거짓말."
규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이면 어떻게 할래? 동시상영이 'XXX'이라던가?"
잠깐 생각하다 규식은,
"좋아.만약 정말이라면 다음 번에 그애들 만날 때 점심값 내기.만약 우리가 지면
우리 셋이 영화비까지 지불할께."
"좋아."
백경은 웃으며 대답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점심값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난 백경편에 걸래."
요섭이다.백경 혼자서 8인분을 낼 걸 생각하면 너무 힘들 것이 분명하므로 요섭이가
같이 십자가를 진 듯하다.
백경은 친구들에게 약속한 날 난희를 불러냈다.의외였다.오늘 성인영화를 본다는
백경의 말에 난희는 대뜸 같이 보자는 것이다.
"정말?"
백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래,아직 한번도 못 봤지만 보여 준다면 보지."
백경은 얼떨떨한 기분에 극장 앞까지 왔었던 것이었다.
"자,그럼 돌진한다."
백경이 키가 크고 어른스러워서인지 쉽게 표를 샀다.그리고 둘은 '20세미만 출입
금지'라는 푯말을 지나 들어갔다.백경은 영화를 보며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름을
알았다.난희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영화 어때?"
복도를 나오며 백경이 물었다.
"그 남자 너무 잘 생겼지?"
"그래.여자 옷 한번 잘 벗기더라.그 여자 몸도 멋있던대.너도 멋있을 거야,그지?"
하지 말라는 듯 난희의 손이 백경의 옆구리를 공격했다.난희의 얼굴은 이미 빨강으로
물들어 있었다.
"난희,네 배가 이만큼 나와서 어기적어기적거리면. 아~!"
난희는 입술을 깨물었고 얼굴은 전보다 더 붉어졌다.
"얼굴 좀 봐.홍당무보다 더 해."
"치,자기는."
둘은 서로의 얼굴을 비웃듯 웃고 있었다.뒤에는 영화를 보기 위한 청소년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기 어때?"
"먼저 들어가."
백경이 먼저 들어갔다.주점이었다.이층 구석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뭘 마실래?"
"네가 시켜.난 이런데 처음이야.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야,너만 처음이냐.그리고 뭐 저기도,저쪽도 고등학생같은데."
"뭘 드시겠습니까?"
"동동주 하나하고 김치찌개 하나요."
잠시 후 술이 왔다.
"어머,퍼서 마시는 거야."
신기한 듯 난희가 외친다.
"아이 신기해.자 내가 퍼 줄께."
"그런데 뭘 위해서 마시지?"
"음.너 대학 들어가는 걸 위해."
둘은 TV에서 본 것처럼 건배를 하고 한번에 들이켰다.난희는 몹시 쓴가보다.
"어유.이런 걸 왜 마시는 지 모르겠어."
"하하.그렇게 쓰니?"
이렇게 말하는 백경도 입안에서는 굉장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둘은 어둑어둑할 때 나왔다.
"내가 잡아줄께.겨우 네잔에 이러냐?"
백경은 난희를 부축했다.
"어유,이상해.다리에 힘이 없어.우리 좀 쉬었다 가자."
"그래.저기 공원 의자에 좀 앉아."
"여기서 좀 기다려.마실 것을 사 올께."
백경도 처음 먹는 술이라 취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남자라서인지 난희정도는
아니었다.그가 음료수를 사 왔을 때 난희는 울고 있었다.
"왜 그래? 울지마."
"흐흑..나....나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아마,넌 나한테 실망할거야."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이야기라면 해 봐.좋은 이야기는 못해주지만
열심히 들어줄께."
"실은....흑..나 학교가..흑..하....학교가 야간이야."
술때문인지,이제 끝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난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백경은 조용히 손수건을 건네 주며,
"참 내,야 내가 만약 이쁘고 학교와 돈을 보고 친구를 사귀는 녀석이라면 왜 온전한
몸의 여학생을 택하지 않았겠니.난 너의 착한 마음씨와 웃는 눈이 좋아서였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약점을 말한다는게,말하는 것보다 말하기 전의 과정이
더 힘든거야.네가 날 믿고 나에게 말을 해 주었다는데에 기쁘고 네가 고마울 뿐이야.
자,눈물 닦고 웃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지."
얼굴을 든 난희는 더 이뻐 보였다.'확실히 여자는 우는 것이 더 이뻐.'라는 생각을
하던 백경은,
"난 네가 좋아."
웃음을 띄운다.난희의 이런 태도는 처음이다.
"늦었어.난 이쪽으로 갈께.넌 저쪽에서 차를 타."
백경은 일어서는 난희의 뺨에 입을 맞추고 부끄러운 듯 뛰어간다.
"난희야.나 대학가서 졸업하면 너의 백마탄 기사가 될께."
이 한마디를 외치며 뛰어가는 백경을 보며 난희는 마음 속으로 대답을 했다.
'넌 이미 내 마음속에 백마를 탄 왕자님이야.'
백경은 종업원에게 맥주를 부탁했다.처음 술을 마실 때는 둘이었는데......
'이번에 내가 가면 반드시 병이 나을거야.요섭의 편지에도 아직 결혼하지 않고
나를 기다린다고 써 있잖아?'
백경은 cafe를 나왔다.대전행 기차를 탔을 때는 술때문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술에 약한 것은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대전에 도착해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안에는 근처 학원의 학생들이 꽤 많았다.
백경도 재수를 했었다.한번의 실패도 하지 않았던 그의 인생에 첫 장애물이었고
그의 실망도 대단했다.그때 난희는 손수 뜬 벙어리 장갑을 주며,
"백경,자 이 장갑끼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손이 얼면 글씨를 못 쓰잖아.
이 장갑은 내 정성이 있으니 따뜻할꺼야.그러니까 다음엔 꼭 합격하라고."
백경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결국 백경은 다음 해에 합격했다.그리고 그들의
우정도 더욱 깊어졌다.백경이 대학 2학년 때였다.높은 가을 하늘 아래서 그들은
창경궁을 거닐고 있었다.
"나 군대 갔다 와서 졸업하고 우리 결혼하는 거야."
"......."
"왜 그래 오늘? 계속 말도 없고."
"......."
"정말 왜 그래?"
"나,앞으로 너 못 만나."
"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나 저번에 선 본거 너도 알지?"
"그래.그쪽에서 네가 너무 어리다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며?"
"응.그런데,그쪽에서 다시 서둘러서 우리 아빠가 결혼 날자까지 잡아 오셨어."
울 것 같은 목소리다.그 높던 가을 하늘을 백경의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듯했다.
한참을 멍하니 걸었다.결심한듯,
"좋아.그럼,내가 너희 가족들을 만날께.그래서 몇 년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하겠어."
"소용없어.결혼 날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걸."
드디어 난희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다.어느 정도 난희의 울음이 가라앉은 후
백경은 반강제로 난희를 끌고 난희의 집으로 향했다.하늘은 백가지의 경사는 주되,
백하나의 경사를 주지는 않나? 집을 나오는 백경은 발이 무거웠다.
골목까지 배웅 나온 난희를 바라보며,
"난희야,이제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네가 좋으면 내일이라도 우린 식을 올리는
거야.하지만 조금,아니 처음엔 무척 고생이 될거야.하지만 난 너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줄거야.고생이 싫다면 조용히 시집가라.내가 예식장이 떠나갈 정도로
박수로 축하해 줄께."
이슬,아니 소낙비가 내린다.돌아서며 난희는 한마디를 남기고 집으로 뛰어가 버렸다.
"난 부모님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하고 싶어."
백경은 며칠 후 휴학계를 내고 지금 있는 강원도 탄광으로 갔다.그리고 난희를 잊고
새 출발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고 난희를 축하해 주려 했다.하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그후 1년이 지난 얼마 전 요섭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난희가 매우 아프고
백경을 보고 싶어하니 한번만 와 보라는 것이다.그리고 맨 마지막엔 난희가
시집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백경은 식사를 마치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최 요섭씨를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역이다.응, 그래."
간단했다.1년만에 만나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30분쯤 후,요섭과 백경은 택시 속에서
첫 대화를 했다.
"난희가 많이 아프니?"
"가 보면 안다."
"왜 시집을 가지 않았데?"
"아저씨.여기서 좀 세워 주세요."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지름길로 걸어가자.그게 더 빠를거야."
요섭이가 앞장 섰다.
"잠깐!"
백경은 무엇을 보았는지 농가로 뛰어갔다.그리곤 무엇인가를 사가지고 왔다.
"난희는 토끼를 좋아 하잖아.병 문안 가는 데 빈 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둘은 또 걸었다.
"휴.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
요섭이가 주저 앉으며 말했다.백경도 소나무에 기대어 땀을 닦았다.
왼쪽에는 약 20m폭의 국도가 있는데 차가 뜸한 대신 차들이 과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인사해라.난희가 여기 누워 있잖아."
요섭은 옆에 한 묘를 가리키며 말했다.백경은 아무 느낌도 받지 못했다.
요섭이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난희가 결혼한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어.네가 떠나기 한달 전쯤 난희는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지.너는 그때 결혼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떠들 때였지만 난희는
너에게 조금이라도 충격을 덜 주기 위해 연극을 했던 것이다.네가 떠난 후 저 산
너머에 있는 외가댁에서 요양을 했다.그러면서도 매일 네 이야기로 시작해서,
네 생각으로 달을 맞이 했었다.네가.....네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편지를 보내
주었다면 난희의 마지막 소원인 너를 만나봤을텐데......"
"앗! 이것이.."
토끼가 백경의 손을 빠져나와 왼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백경은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갔다.그때 다른 주머니에 있던 벙어리장갑도 땅에 떨어졌다.
땡~ 땡~ 땡~
12번의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짝 잃은 벙어리 장갑만이 뛰어 다니는 토끼를 지켜볼
뿐이었다.